"당신도 어차피 임기 마치면 떠날 사람 아닌가."



고위 공직자로 일하다 소위 낙하산을 타고 공기업 사장으로 내려온 A씨. 회사 경영 전반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깜짝 놀랐다. 급여 수준은 물론이고 이런 저런 명목의 사원 복지 혜택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 비록 단기지만 전 직원 해외연수 제도까지 있는 것을 보고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혜택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했고, 당연히 노동조합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쳤다. 덕분에 사장 퇴진운동이라는 곤욕을 치르고 나서 적절히 타협을 했다. 그때 노조의 말이 그랬단다. 왜 당신만 그렇게 유난을 떠냐고.

무신론자인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종교를 가리켜 '으뜸패'(카드놀이에서 다른 모든 패를 이기는 패)라고 비아냥댔지만, 정작 우리 사회에서 으뜸패는 노동조합이 아닌가 싶다. 노조는 일단 투쟁에 나서면 승률이 불패에 가깝다. 양보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듯하다. 높은 임금인상률을 제시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파업을 불사한다. 파업 찬반투표 등 대부분 표결이 90% 안팎의 찬성으로 통과되듯 결속력이 매우 강하다. 나중에는 파업철회 조건으로 해고자 복직과 파업기간 임금 지급까지 얻어낸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전두환 대통령 말년인 1987년쯤 본격 시작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 전까지는 군사정권의 억압 속에서, 그들의 주장대로 자본가로부터 착취 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봇물 터지듯 목소리가 커졌다. 물론 노동운동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 거대 자본권력에 맞서 노동자 권익을 지켜내고, 기업의 투명경영을 유도하는 역할도 해냈다.

97년 외환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노조에는 더 큰 기회로 다가왔다. 당시 기업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오르면서 '고용의 유연성'이 강조됐고, 곧바로 파견근로제가 시행되면서 기업은 싼 값으로 비정규직이라는 인력을 쓰게 됐다. 이 같은 친기업 정책들로 기업 형편이 나아지면서 혜택은 정규직에게 돌아갔다. 비정규직의 애환은 그들의 이야기일 뿐 정규직 노조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임금, 복지, 근로조건 개선이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비정규직 근로자의 노조 가입을 대의원회의에서 번번이 부결시켰다. 자신들의 몫을 나누게 될까 두려웠을까. 아니면 일각의 눈총대로 경기가 안 좋아 구조조정이 필요할 때 비정규직을 충격 완화장치로 사용하려는 심산인가.

비정규직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지만 정작 정규직 노조의 양보와 희생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사실 붉은 띠를 머리에 동여맨 노조의 극한 투쟁에 대해 국민들이 어느 정도 이해의 눈길을 보낸 데에는 "다 먹고 살기 위해 그럴 것"이라는 동정심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대기업 노조의 투쟁목표는 생존권 확보가 아니라 조직원의 이익극대화에 있는 듯하다. 비정규직을 애써 외면하고 '자기들만의 잔치'를 계속한다면 과연 그런 시선이 유지될 수 있을까.

현재와 같은 비정규직 제도가 방치된다면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부메랑이 돼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보다도 고용시장이 더 유연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과 해고를 더 쉽게 하자는 얘기다. 그게 아니더라도 기업들은 점차 비정규직을 늘려갈 게 뻔하다. 종국에는 극소수 관리자와 일부 핵심근로자를 제외하고는 직원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채워질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내 아이만큼은 정규직에 안착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가.

기자는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서도 정규직 노조가 '으뜸패'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더불어 사는 사회 건설에 노조가 앞장서 줬으면 좋겠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비정규직 해법을 국회와 정부에만 떠넘기지 말고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 줬으면 좋겠다.

jwbyu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