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동 칼럼] 대통령의 재산 헌납 후 기사의 사진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이후 이듬해 4월 총선 때까지 이재오 의원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이명박 경선승리 1등 공신으로 '공인'받은 그는 후보의 최측근으로서 점령군 최고지휘관 같았다.

먼저 그는 박근혜 경선후보 진영에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고 "후보 낙마나 교체를 생각하며 승복 화합을 내세우는 것은 구태"라며 막말 수준의 공세 고삐를 죄었다

그 무렵 이명박 후보는 "이재오 의원을 비판하면 내 지지자가 아니다"며 그를 감쌌다. 박근혜측을 겨냥해 "자는 척 하는 사람은 깨울 필요없다"고도 말했다. 이듬해 2월 대통령 취임식을 거쳐 4월 총선에 이르는 동안 여권에서는 박 전 대표 진영과 관련해 '독식' '찬밥' '공천 배제' 등 낡은 시대의 용어가 난무했다.

이재오 의원의 결기(決氣)는 계속됐다. 당 결속에 앞장서기보다 거친 언사로 분란의 중심인물이 됐다. 그 와중에서 기록적인 500만표 차이로 이 후보가 대승한 것은 좌파정권에 대한 염증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기대에는 못미쳤지만 2008년 4·9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은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그 때 이 대통령은 "국민통합과 타협의 정치를 펴면서 경제 살리기와 민생 챙기기에 매진하라는 준엄한 명령"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출마할 일이 없으므로 정치적 경쟁자도 없다며 "이제 한나라당에 친박은 있을 지 몰라도 친이는 없다"고 했다.

“私心을 벗어나 조금만 더 눈을 들어보면 도덕적이고 능력있는 인재들은 많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은 순탄치 않았다. 1차 원인은 여당 조차 추스리지 않은 권력의 독주였다. '그들만의 공천혁명'도 박근혜 세력 무력화와 무관치 않았고, 이내 역풍이 휘몰아쳤다. 유권자들은 배후 여부를 떠나 이 의원과 또 한명의 실세로 눈총받던 다른 이 의원이 공천을 좌지우지했을 것으로 봤다.

친박계 낙천자들은 줄줄이 독자출마했고, 박근혜 전 대표의 호소대로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재오 의원과 또다른 이 의원은 뜻밖에 고배를 마셨다. 공천이 제대로 됐으면 한나라당은 대선압승 여세로 개헌선(200석)도 거뜬히 확보했으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총선 뒤 촛불문화제란 미명으로 시작된 광우병소동은 나라를 공황상태로 몰아갔다. 좌파와 동조 매체들이 촉발하고 주도한 왜곡·편파·선동, 선한 사람들까지 몇달씩 가세한 쓰나미에 정권측은 속수무책이었다. 자업자득에 10년 좌파정부 잔재의 저항까지 겹쳐 집권 첫 해를 거의 허송했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자책은 정권 스스로도 뼈아파 할 집권 초기 고위직 인사풍파다. 땅을 사랑하므로 불법·편법으로 땅을 (많이) 갖고 있다는 식(式) 사고에 젖은 인물들을 발탁해 '고소영' '강부자'로 조롱당한 정치낭비는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더 눈을 들어봤으면 유능하고 도덕적인 인재들이 왜 없었겠는가.

한나라당에 여전히 내재하는 불화와 반목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는 소문이 있다. (퇴임 후를 고려해) 원칙주의자 박근혜로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보다 정권 교체가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다. 재집권 이후 한나라당에서 내연해온 불신을 사람들은 이처럼 강도높게 꼬집는다.

월급 전액을 불우 이웃을 위해 기부해온 이 대통령이 330억원 넘는 재산까지 내놨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을 돕겠다는 뜻은 숭고하다. 재산 헌납은 정치행위와 별개지만 화합과 인사도 그것처럼 산뜻하면 박수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민심은 냉혹하고 변덕스럽다.

편집인 jerome7@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