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한마당


'옛날 옛적에' 간첩 식별법이 있었다.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거나 바닷가를 배회하는 자, 한밤중에 몰래 북한 방송을 듣는 자, 정부 시책을 비난하고 북한을 지지 찬양하는 자, 남한의 물가나 지리를 잘 모르는 자' 등.

지금 보면 코미디다. 하지만 그때는 국민 모두 숙지해야 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식별법에 걸려들어 붙잡힌 간첩이 과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설령 검거됐다 해도 그 간첩은 아마도 조무래기였을 터. 대부분의 거물 간첩은 스파이 세계에서 '두더지(mole)'로 불리는 고첩(고정간첩)이기 때문이다.

두더지는 적어도 10년 이상, 멀리 내다보고 미리 적 내부에 심어놓는 간첩이다. 이런 '두더지 심기'를 그랜드 투어(Grand Tour·투어에는 '임무 기간'이라는 뜻이 있다)라고 한다.

두더지들은 적의 정치 군사 첩보 등 주요 기관에 침투해 장기적으로 정보를 빼낸다. 그 과정에서 요직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영국인 소련 간첩 해럴드 '킴' 필비와 동독 간첩 귄터 기욤이 그 예.

1934년 소련 KGB에 포섭된 필비는 39년 영국 해외정보국(MI6)에 침투한 뒤 정체가 탄로나 63년 소련으로 망명할 때까지 거의 30년 동안 각종 정보를 소련에 넘겨줬다. 그 사이 그는 MI6의 국장직을 넘볼 만큼 고위직에 올랐다. 동독의 정보조직 중앙관리국(HAV) 소속인 기욤은 56년 서독으로 위장 망명한 뒤 공산당과는 적대적인 사민당에 가입, 정관계에서 출세를 거듭한 끝에 빌리 브란트 총리의 정무보좌관까지 지내면서 약 20년간 간첩활동을 벌였다.

물론 아시아에도 두더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중국 공산당 간첩으로 국민당군 부사령관까지 지낸 리창. 그는 일찌감치 1939년 국민당 첩보 조직에 침투, 45∼49년에 치러진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국의 패권을 놓고 싸웠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리창의 암약을 비롯해 양측간 치열했던 첩보전을 그린 중국 TV 드라마 '잠복'이 요즘 중국인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한다. 양안관계 개선 등 시대 변화를 반영한 듯. 이 소식을 접하면서 60년 넘게 대치 중인 남북한, 특히 남한에서는 어떤 두더지들이 암약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어쩌면 나중에 "그 사람이?"하고 경악할, 혹은 "과연!"하고 무릎을 칠 인물이 두더지로 밝혀질지도 모른다.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