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박현동] 재벌과 여론경제 기사의 사진

한국 사회에서 '재벌(財閥)'만큼 휘발성이 강한 단어도 없다. 어떤 사건이나 정책에 재벌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사회적 논쟁으로 비화된다. 재벌 논쟁은 정치나 경제뿐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의 발전을 가로막는 아킬레스건으로도 작용한다. 소모적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상황은 오래 지속될 것 같다. 왜냐면 재벌 논쟁은 가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문화 심지어 스포츠에도 재벌이 개입되면 논란은 본질에서 벗어난다. 이뿐 아니다. 특혜시비가 제기되고,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가끔 뭇매가 가해지기도 한다. 이런 점을 역이용하는 세력 또한 없다고 할 수 없다.

재벌은 주로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때론 범죄적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다분히 감정적이다. 비과학적일 때도 적지 않다. 누구를 탓하기엔 그 뿌리가 깊다. 대기업은 성장 과정에서, 그동안 정치권력과의 관계설정에서 정상적이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할 수 없다. 재벌 원죄론의 근거다.

더러는 이데올로기 다툼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최근 정국 최대 이슈인 미디어 관련법을 둘러싼 논쟁이 그 단적인 예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언론계는 언론계대로, 각자 손익득실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도 반(反)재벌론과 친(親)재벌론이 번득인다.

야권은 '언론 악법'이라는 의제설정을 통해 여론을 주도하고, 여권은 '미디어 산업'으로 포장한다. 야권과 진보층은 '재벌 언론에 이어 재벌 방송을 허용하려는 악법'이라고 몰아세운다. 반면 여권과 보수층은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법이라고 주장한다.

양측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기에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양쪽 모두 속내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솔직히 각각의 주장 속에 정치적 목적이 없다고 하긴 어렵다. 야권은 신문시장에서 보수지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마당에 방송까지 보수 세력이 지배하게 되면 정권을 되찾는 것이 힘들다고 본다. 반면 보수 세력은 방송을 지배하지 못하면 정권 재창출이 쉽지 않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포장만 다를 뿐이다.

기업형 슈퍼마켓(SSM·Super Supermarket) 논쟁에도 재벌의 환영(幻影)이 어른거린다. 동네 골목에 SSM 진출을 반대하는 쪽은 "재벌이 동네 구멍가게를 죽이려 한다"고 반발한다. 반재벌 냄새가 난다. 반대로 대기업 계열 유통업체들은 "언제까지 대기업 타령을 할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 자기중심적 논리다.

정부는 최근 구멍가게에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정책을 정했다. 상생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여론을 의식한 선택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이른바 '여론 경제'다. 정책 결정에 있어 여론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항상 정당한가? 이에 대한 답은 과거 몇몇 경험이 말해준다. 멀리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가까이로는 천성산, 사패산 터널 공사를 둘러싼 찬반 여론이 있었다. 그 결과는? 또 정부가 수십년 동안 과보호 정책을 폈던 농촌의 지금 경쟁력은 무엇을 말하는가.

약자를 보호하지 말자는 게 결코 아니다. 하지만 보호를 하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기를 줄 것이 아니라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하고, SSM을 둘러싼 갈등 해법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 경제의 결과가 어떠한지는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박현동 산업부장 hd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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