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너머] 4부 小邑,절멸과 자생 ⑩ 수원,華城樂譜(상) 기사의 사진

정조의 꿈, 미려한 아름다움에 녹아들다

"참으로 아름답고 장대하다. 다만 사치스러워 보일까 두려워한다. 미려한 아름다움은 적에게 위엄을 보여준다."

1797년, 정조는 완공된 수원화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수원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정조대왕의 정치적 이상 속에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서울 창덕궁에서 화성과 융건릉, 용주사에 이르는 '수원 80리(사실은 88리지만 왕의 원행은 80리 밖을 넘을 수 없는데 정조가 우기고 다녔다 해서 수원 80리라는 말이 생겼다)' 길을 가본다. 노론세력에 희생된 아버지를 복권시켜 능을 만들고 최대한의 헌신을 바친 길이자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을 견제하는, 200년 전 정치와 역사의 길이다.

한강 건너 사당에서 남태령을 넘는다. 고개이름을 묻는 임금에게 '여우고개'라는 속말을 쓸 수가 없어 과천 이방은 점잖게 "남쪽의 큰 고개 남태령입니다" 했다던가. 지금은 산을 깎아 다듬은 대로지만 양옆에 버틴 산세를 보면 그전의 험난했을 길이 짐작된다. 과천행궁과 '찬 우물' 동네를 지나고 8차선의 경수 산업도로를 한참 가 지지대 고개를 넘는다. 노송이 늘어선 길로 들어갔다가 남쪽으로 향하면 곧 화성의 북대문, 전돌로 쌓은 장안문이 눈에 들어온다. 성문 양옆에는 포루가 장엄하고 높은 성벽은 구불구불 이어나간다.

1795년 봄 정조는 조정 신하등 수행원 1779명 포함, 척후부터 배후까지 모두 5661명의 인원과 말 779필을 동원한 을묘년 대행차를 했다. 13번의 화성 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을묘원행은 어머니 혜경궁의 환갑행사를 사도세자 능 옆 화성에서 베풀어, 화성과 장용영 군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행차에서 정조는 황금 갑옷차림으로 말을 타고 대장기를 앞세운 채 서울 숭례문보다 더 크고 조선 전체에서 가장 웅장한 장안문으로 입성, 화성에 들어왔다. 그리고 4일간의 화성체재에서 행한 모든 일은 찬란한 문화의 장으로 남았다.

수원은 한강 넘어 충청·전라·경상 삼남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요지이다. 이곳에 정예군사를 두고 철옹성을 쌓고, 백성을 모으고 농·상업을 일으켜 신도시를 건설한 것은 삼남의 곡창과 군사를 배후로 어떤 적과도 대치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도 공군비행장이 있고 주변엔 미군도 와있는 군사도시다.

"정조는 노비개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이 땅과 백성을 진정으로 생각한 혁명수준의 정치개혁을 원했다. 그런 정조에게 화성은 서울의 노론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행사할 자리였다. 화성은 정조와 그의 사람들의 사상과 학문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고 정조 연구자인 화성박물관 김준혁 학예팀장이 말했다. 채제공 정약용 조심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같은 사람들이 끝까지 정조와 그의 꿈을 함께 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서양문물을 소개한 천금의 책까지 주어가며 연구시켜 동서양 성곽의 이론을 망라한 뒤 장점만 택해 내놓은 화성 기본계획서는 그렇게 나왔다. 영조가 "참으로 사심이 없는 나의 신하이며 세손을 위한 충신이다"고 한 남인 출신의 유일한 영의정 채제공은 화성유수 직책까지 맡아 정치적으로 정조를 보필했다. 화성은 1794년부터 1796년까지 무수한 설계변경과 난공사를 거쳐 완공되고 48개 시설물을 지녔다.

화성 관련 기록을 보면 화성현장에서 공사를 이끈 행정가이자 무인 화성유수 조심태란 인물에 대한 경외감부터 말 탄 해병대나 특수부대 같은 느낌의 장용영 무인들, 18세기 궁궐문화의 진수를 만든 사람들, 미장이 석수 등 일을 한 예술가이자 평민 김큰노미·이작은쇠·박복돌, 건물보상비를 두고 알박기하는 주민, 허위보고 했다가 혼나는 관리 등 무수한 인간상과 조우한다. 87만3517냥7전5푼의 돈이 들어간 화성건설 전말을 낱낱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책에는 건물 한 채 짓는 데 들어간 못의 수량까지 기록돼 있다. 예산 중 32만냥은 자재비, 30만냥은 인건비, 20만냥은 운반비로 쓰였다. 지금 화성을 복원하는 예산이 1조원 대를 넘는 것을 보면 당시의 87만냥이 얼마나 천문학적 금액이었을지 알 것 같다.

건설인력 70만은 무상 동원이 아니라 칼처럼 정확한 노임을 받고 일하게 된 이 공사에 신을 내고 혼신의 힘을 다한 것 같다. 10년을 예정한 화성건설이 3년이 못돼 끝난 것이다. '화성성역의궤'같은 치밀한 건축서는 세상에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을 기록한 이 책이 있어 오늘 화성 전체가 복원되고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다. 한 학자는 이 책을 두고 그저 "무섭다"는 말로 표현했었다. 세계는 화성을 '동서양을 망라해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갖춘 근대초기 군대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라고 정의했다.

성에는 5743m 둘레를 돌아가며 30여 건축물이 100∼200m마다 마주 보고 있다. 대포를 쏘는 군사시설과 중국·일본 성의 장점을 차용한 성 쌓기는 임란이후의 근대를 느끼게 한다. 군사기능 말고도 경관과 멋과 정조의 위엄을 한껏 살려낸 건축임이 눈에 들어온다. 전돌은 붙여놓으면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돌보다 단단해진다. 그런 전돌 옹성을 두른 성문을 건축하는 고사를 지내면서 '조선에서 북두성같이 존재하길' 바랐었다. 그때 지어진 건물 중 지금까지 남은 것은 팔달문, 화서문, 서북 공심돈, 연무대, 방화수류정 정도이고 나머지는 1970년대에 복원됐다. 팔달문은 올해 해체 복원된다.

누구는 조선의 어느 수문보다 큰 7칸 수문의 화홍문과 그 앞 버드나무가 줄지어 물길을 따라 서 있는 버드내 수원천 풍경이 좋다하고 누구는 서남 암문을 통해 길게 뻗어나간 서남 각루가, 정조가 군사훈련을 지휘한 서장대가, 장용영군사들이 줄기차게 무예 24기 훈련을 하던 드넓은 연무대가, 소라처럼 돌아 올라가며 포를 쏘게 한 공심돈이 좋다고 한다. 연못을 낀 용바위 위에 높이 선 섬세한 조각 같은 방화수류정은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간다'는 뜻이다. 연못에 버드나무가 많은 여기는 화성에서도 손꼽히는 명승을 이룬다.

정조는 "모든 정자는 양반과 평민이 같이 이용하라" 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정자마다 낮잠 자는 사람이 있고 깊숙한 곳의 누각에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이도 있다.

더운 여름날 성을 따라 걸어가면서 보는 성안 마을은 야트막한 집들이 너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동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수원이 생기면서부터 열린 영동시장 일대는 왁자지껄, 활력이 넘쳐난다. 과일가게 주인은 "그저 오래된 시장" 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정조가 애써 키워낸 수원 거상의 흔적이 어디 있나 했는데, 국회의원 선거 나갔다 떨어지고 돈 날리고 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수원출신으로 자매가 같이 동경유학을 한 화가 나혜석은 부친이 수원 면장을 지낸 토호였다. 그녀가 남편 김우영과 파리에 갔을 때 산 반지를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행려병동으로 가기 전 동경유학 후배인 한 여성에게 팔았다. 조그만 백금 원판에 작은 다이아몬드를 예닐곱개 별처럼 박아넣은 것이었다. 그것은 나혜석이 마지막까지 지녔던 물건인 듯했다. 그녀의 잘생긴 얼굴과 열정, 그 반지가 언제나 겹쳐서 떠오르곤 한다.

정조가 농업개혁을 생각해 만든 큰 저수지가 몇 개나 있어 삼도에 가뭄이 들어도 신도시 수원에서는 풍년을 맞았다. 농촌진흥청과 과거 서울 농대가 여기 터를 잡은 것도 정조의 농업정책 영향이 아닐 수 없다. 성 밖 논 자리는 지금 고층 아파트지구다. 우만동에는 1960년 초까지도 큰 우시장이 있었다. 맛있고 커서 유명한 수원갈비는 그 우시장의 소한테서 전통이 내려왔다고 한다. 지금은 미국서 온 갈비를 준다.

김유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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