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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손수호] 체험적 흑인론


미국에 잠시 체류할 때 머물던 집은 월세가 다른 지역보다 100달러 정도 비쌌다. 분위기와 학군이 좋다는 게 이유였다. 요컨대 흑인이 드물다는 이야기였다. 동네는 조용했다. 길에 세워진 차는 없었고 골목에서 소란 피우는 아이도 없었다. 이웃끼리 만나면 가벼운 인사를 나누되 사생활은 눈곱만큼의 참견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게 교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가 교란되기 시작했다. 앞집에 흑인 가족이 이사온 것이다. 그들은 수시로 친지를 불러 웃고 떠들었다. 자동차가 드나들 때는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 넘쳤다. 주민들은 긴장했다.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집값이 떨어지고 교육 환경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으리라.

집안에서 TV를 보는 어느 일요일 저녁답에 통통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못 듣던 소리라 나가보니 흑인 아이들이 길에서 농구공을 튕기고 있었다. 어제 제 집 드라이브 웨이에 세워 놓은 농구대가 바람에 쓰러진 것을 보았는데, 이제 길 언저리에 내놓고 슛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양의 동서를 넘어 공 소리에 초연한 아이는 없다. 그 교양에 찌들던 우리집 애들이 금방 뛰쳐나갔다. 한참 후 "걔네들 농구짱!"이라며 돌아오는 아이에게 "흑인과 놀지 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남의 농구대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주의를 줄 수밖에.

다음 날 더 큰 일이 벌어졌다. 같은 시간에 동네 아이들이 와르르 농구대 앞에 모인 것이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아이는 물론이거니와 옆집 인도 아이, 히잡을 쓴 어머니 때문에 늘 조심스럽던 길 건너 요르단 아이까지 가담했다. 아이들은 농구공을 둘러싸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른들도 거리로 나왔다. 농구공을 다투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나중에는 집안끼리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사이로 이어졌다. 흑인 아이의 통통 농구공 소리가 동네 화합을 이루는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백악관 맥주 파티를 보다 떠오른 오래 전 풍경 한 토막이다. 세계 여러 곳의 피가 섞인 오바마도 인종 문제에 관한 한 주머니 속의 송곳을 숨기지 못했다. 누가 인종 문제를 쾌도난마식으로 해결할 수 있으랴. 다만 인정하고, 사과하고, 만나고, 웃으면서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역시 오바마스러웠다. 어제 4일이 그의 48세 생일이었다고 한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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