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꼬인 듯한 발음을 했다. '이역만리'가 '이억만리'처럼 들렸다. 혹시 발음이 꼬인 게 아니라 용어 자체를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닐까. 그 방송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기사에 '이억만리'로 돼 있다. 이번엔 포털 사이트에서 '이억만리'를 검색했더니 각 신문의 기사가 넘쳐난다. 단순 오타라고 하기엔 너무 많다.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라는 확신을 가질 만하다.

사람들이 이역만리를 이억만리로 받아들이는 이유를 유추해 본다. 한글 전용세대여서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한자를 모르니 한자어를 순우리말 식으로 습득한다. 발음도 비슷해서, '눈살'과 '눈쌀'의 차이 쯤으로 인식해 대충 선택해 쓰기 쉽다. 게다가 이억만리는 억만리의 두 배로서, 강조의 뜻을 지닌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말에 억만장자는 있어도 억만리는 없다. '2억만리'는 논리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에서 '환골탈퇴'나 '야밤도주'를 검색하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사가 뜬다. 각각 '환골탈태' '야반도주'의 잘못이다. '막연한 사이'를 검색하면 '막역한 사이'를 잘못 쓴 사례가 수두룩하다. 둘은 뜻이 정반대다. '장사진'은 뱀처럼 길게 늘어선 모양을 말하는데, 사람들은 '장사진을 친다'를 장사하기 위해 진을 친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요컨대 사람들이 운집했을 때는 '장사진'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다들 한글 세대가 안고 있는 약점이다.

며칠 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들어가 두 여기자를 데리고 왔다. 그걸 두고 우리 야당 대변인이 말했다. "(우리) 정부 당국은 클린턴의 방북을 타산지석 삼아…."

'타산지석'은 앞말이 부정적인 상황일 때 쓴다. 조장(助長)이나 반면교사(反面敎師)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상황에는 적절치 않다. 한데, 한글 전용세대들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뜻만 통하면 됐지 어원까지 따지느냐는 것이다. 기실 말도 진화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들 용어가 부정, 긍정 가리지 않고 쓰일지 모른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안됐다.

이병갑 교열팀장 bklee@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