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본 유학생이 유학 초기에 겪었다는 일. 식당에서 동아리 선배들과 식사를 하려는 찰나에 다들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학생이 얼떨결에 "아, 예, 많이 드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식사가 끝난 뒤 먼저 계산대에 갔더니 그 선배들이 말리더란다. 그제서야 이 유학생은 '잘 먹겠습니다'가 일본인들의 식사 언어 예절임을 알았다고 한다.

우리에겐 '잘 먹겠습니다'는 말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맛있게 먹겠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잘 얻어 먹겠다'는 뜻이다. 전자는 집으로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주로 쓴다. 또 자녀들에게 그런 언어습관을 길러주는 가정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식당에서는 이런 말을 자제하는 게 미덕일 수 있다. 후자의 뜻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계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에두름 표현인 것이다. 누가 살 자리인지 애매할 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처럼 말하면, 그는 자리에서 늦게 일어날 권리를 갖는다. 그렇건만, 비록 초대를 받은 자리라 하더라도 이런 말을 하면 실례가 되기 쉽다. '잘 먹겠습니다'보다는 '잘 먹었습니다'가 더 자연스러운 식사 언어 예절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에두름 화법에 인색하다. 완곡한 표현보다는 똑부러진 표현을 선호한다. 예컨대 집에 온 손님을 등 떠밀어 내보낼 때는 대개 '나가' 혹은 '나가 주세요'라고 말한다. 반면 서양 영화를 보면 '문 열려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직설화법은 감정이 잘 드러난다. 표현이 정확하니 시원한 맛은 있는데, 자칫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기 쉽다.

요즘 부정 혹은 이중부정 표현이 널리 쓰인다. '책임이 없지 않다'와 같은 꼴이다. 이는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일부에서는 가급적 긍정 표현을 쓰라고 권한다. 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전자는 '있다'가 아닌 '조금 있다'는 뜻이다. '적지 않다'와 '많다'도 뜻이 다르다. 전자에는 '적당하다'는 뜻도 있다. 이 역시 에두름 표현의 일종이다. 굳이 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병갑 교열팀장 bk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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