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동 칼럼] 화해와 일치,이래야 합니다 기사의 사진

쌍용자동차 노조의 '결사항전'이 큰 불상사 없이 끝난 것은 다행이다. 피해액이 3000억원이라니 망가진 회사 이미지, 브랜드, 판매망 등 무형의 손실까지 더하면 피해 규모를 어림잡기조차 어렵다. 비슷한 유형의 사례가 널려 있는데 왜 굳이 체험적 실험을 통해 그토록 비싼 대가를 치렀는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인류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해 왔지만 인간 심성의 본질만큼은 불변임을 쌍용차 사태에서도 실감하게 된다.

쌍용차 파업농성 회오리가 끝난 뒤 민주당을 비롯한 몇몇 야당 대표는 합동기자회견에서 경찰이 현장에 진입한 것을 맹비판했다. 이른바 과잉진압을 문제삼았다. 바꿔 말하면 애당초 강제해산에 나서지 말았어야 하는데 공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이었다. 근사한 표현으로 공적자금이지 국민세금을 들이부어 회사를 살려내라는 쌍용차 안팎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한 앞길이 뻔했던 파업농성을 왜 평정했느냐는 원망처럼 들렸다.

새 미디어법 국회 통과 이후 펼쳐지는 일련의 야당측 공세는 (여당의 맞대응과 더불어) 10월 재·보궐선거를 염두에 두고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등의 분석도 나온다. 쌍용차 노조 투쟁을 지켜본 국민들의 대체적인 시각은 그것이 과잉 정도를 넘어 국기문란으로 치달았다는 데 모아졌지 싶다. 쌍용차 사태 진행과정에서 그 야당들이 기댈 언덕이라며 위로받은 국민이 몇일까.

“갈등은 성숙한 사회로 가는 축복의 통로일 수 있지만 정반대일 수도 있다”

정권에 대한 비판과 감시 견제는 정권 쟁취 못지않은 야당의 또 다른 존재 이유다. 여기서는 의제 설정과 목표 달성의 방법이 일반적으로 사사로운 이익에 집착하는 개인·집단과는 구별돼야 한다. 석달 가까이 지속된 쌍용차 소용돌이에서, 또 파업농성 해제 후 야당(들)이 보인 행보는 일이 더 꼬이게 하는 쪽에 기울었다. 심하게 비유하면 떡 본 김에 제사 지내자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백성을 바보천치 쯤으로 여기거나, 중우(衆愚)정치에 미련이 있지 않고서야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일부 정당 정파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반대하고 비판한다. 그들은 매사를 거꾸로 해석하고 논평할 줄 아는 비상한 재능을 지녔다. 이 바쁜 세상에 절대다수 국민은 그런 데서 위로 받기보다 그런 투박한 투쟁에 지쳐 있다. 옳은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은 여·야당 간 극한투쟁이 오래 지속되면 비방(秘方)처럼 양보와 타협을 제시한다. 때때로 이것은 효험이 있다.

그러나 양보와 타협은 그 자체가 나무랄 데 없음에도 모든 사안, 모든 개인·집단에 금과옥조가 될 수 없다. 옳고 그름에서 심각한 왜곡이 강요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공자 말씀'은 자주 이처럼 무책임하다. 이런 현상은 노사 간의 대결 국면에서도 흔하게 봤다. 이를테면 체제 부정 내지 전복을 꾀하는 부류까지 양보와 타협의 미명 아래 쉽게 보호받아 왔다. 교화, 격리, 척결이 필요하지 그들은 마냥 안고 갈 대상이 결코 아니다.

쌍용차 사태와 관련한 수사가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쌍용차 노조원과 외부인을 합쳐 지금까지 60여명을 구속한 데 이어 다른 50여명을 대상으로 좌파단체의 개입 부분에 대해 수사를 본격화했다. 야권과 재야 일각에서 공안정국을 들먹이며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수사가 비틀대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공공의 안녕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없을 뿐더러 지금은 공안수사에 시비를 걸 시대도 아니다.

좌·우파 정권을 바삐 거쳐오면서 사회 구석구석에 극단의 가치관이 어지럽게 형성됐다. 국민통합으로 통칭되는 화해와 일치는 어쩌면 이 시대의 최대 명제가 됐다. 여기서 일치는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의 그것과는 물론 다르다. 긍정적으로 보면 지금 우리 주변에 횡행하는 온갖 대립 갈등은 성숙한 민주사회로 가는 데 불가피한 축복의 통로일 수 있지만 정반대일 수도 있다. 진정한 화해와 일치는, 아닌 것들을 용기있게 걸러낼 때에야 가능하다.

편집인 jerome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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