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성영 (14) 장애 한탄… 울며 걷던 서울역 광장

[역경의 열매] 김성영 (14) 장애 한탄… 울며 걷던 서울역 광장 기사의 사진

'1982년 4월26일 화창한 봄날에 사랑하는 내 둘째 딸 신희는 세 살과 다섯 살 난 두 딸과 남편을 남겨놓고 만 2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암 수술을 받은 날부터 167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신희는 전주예수병원 병실에서 숨을 거뒀다. 아내가 신희의 눈을 감겨주었다.'

지난 8일자 국민일보 24면 '내 삶의 찬송'에 실린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 김준곤 목사님의 글 일부다. 그것을 읽는 순간 울컥했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글 한 편에 숨겨있기 때문이다.

81년 11월의 마지막 주일, 나는 여수제일교회 청년회장에 세 번째로 당선됐다. '여수시를 예수시로! 일어나서 함께 가자'를 표어로 정하고 여수 지역 성시화 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이와 함께 새해 사업 구상으로 "초교파 전도 집회를 통해 여수 성시화 운동을 추진하겠다"면서 "강사는 김준곤 목사님이나 가나안농군학교장 김용기 장로님을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그해 12월31일 밤 여수제일교회 지하식당에서 청년회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40여명의 청년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여수 예수성시화운동본부'를 창설했다. 교파를 초월한 그리스도 제자들이 여수 복음화를 위해 함께 뛰어보자며 들뜬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82년 1월7일 김 목사님을 여수성시화운동 제1회 전도 집회 강사로 섭외하기 위해 서울 CCC 본부를 방문했다. 목사님을 만난 자리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여수 성시화 운동의 비전을 전했다. 그리고 5월 21∼23일 여수제일교회에서 열리는 집회에 꼭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목사님은 흔쾌히 수락했다. 강사와 일정을 확정하고 본격적으로 행사를 준비했다. 그렇게 벅찬 기대를 안고 집회를 준비하던 4월 하순 어느 날, 김 목사님 비서실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4월26일, 김준곤 목사님 둘째 따님이 돌아가셔서 국내외 모든 스케줄이 취소되었습니다."

바로 목사님이 '내 삶의 찬송'에서 언급하신 내용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장례식에 참석해 목사님부터 만나보자. 전속 간호인으로 나를 챙기던 아내에게 사정이 생겨 대신 육촌 매제를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우리는 밤 11시 야간열차에 올랐다.

중간에 목이 말라 음료를 마신 게 화근이었다. 새벽 6시쯤 갑자기 복통이 시작됐다. 서울역 도착 즉시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나는 손이 불편하고, 매제 역시 돕는 손길이 익숙지 않아 허둥대다 그만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몸을 씻고 옷도 세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여관을 찾아 어두컴컴한 서울역 광장으로 걸어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손가락질하는 듯했다.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오리걸음으로 광장을 빠져나오는데, 어느새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 됐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었더라도, 내가 성시화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도, 과연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낭패를 당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하나님, 저는 정치인도 큰 교회 목사님도 아닙니다. 왜 손도 팔도 없는 제가 이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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