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성영 (15) 여수시를 ‘예수시’로… 82년 첫 집회

[역경의 열매] 김성영 (15) 여수시를 ‘예수시’로… 82년 첫 집회 기사의 사진

"몸이 불편한 내가 대체 뭔데, 성한 사람들도 나서지 않는 일을 하겠다고 난리인가. 당장 관두자." 어차피 김준곤 목사님의 집회도 취소된 마당에, 더 이상 성시화운동에 미련을 갖지 말자고 다짐했다. 허름한 여관에서 몸을 씻고 옷을 대충 말려 입은 뒤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장례예배를 드리고 장지로 떠난 뒤였다. 뒤늦게 마석의 공원묘지까지 따라갔으나 또다시 한 발 늦었다. 복통 때문에 온종일 식사도 거른 상태로 그렇게 서울을 헤맸건만, 김 목사님과 유가족을 조문하지 못했다.



결국 늦은 밤 여수행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피곤함이 밀려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여수를 사랑하느냐?"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예,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여수를 예수시로 성시화하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느니라." 그건 분명 주님과 나눈 대화였다. 그리고 잠시 후 주님은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셨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고, 너의 눈물을 보았느니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서울에서 여수까지 7시간을 달리는 통일호 야간열차에서 나는 참으로 황홀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한 달쯤 뒤 김준곤 목사님의 비서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목사님께서 기력을 회복하셨습니다. 첫 공식행사로 여수성시화운동 집회를 인도하신답니다."

이로써 여수성시화를 위한 전도집회는 다시 한번 불붙었다. 집회는 6월로 연기했다. 성경구절을 넣어 지역 방송과 신문을 통해 적극 홍보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순천지방검찰청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당시는 제5공화국 군사정권 초기로, 사회 분위기도 냉랭했다. 갑작스런 전화에 나는 움찔했고,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박주인 검찰청장님은 순천세광교회 장로라고 했다. 그리고 "요즘 신문 방송에 계속 나오는 '여수성시화운동'이 뭐요?"라며 짧게 물었다. 나의 대답은 길고 구체적이었다.

"여수성시화운동은 여수시를 예수시로 복음화하자는 전도운동입니다. 여수는 충무공의 구국 성지이며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성지입니다. 손 목사님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여수시를 예수시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여수제일교회 청년회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여수지부가 중심이 되어 비정치·비영리·비교파라는 '3비운동'을 전개합니다. 또 기도·말씀·전도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여수성시화운동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여수시의 새 이름 '예수시'를 창조하려는 운동입니다."

검찰청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재차 물었다. 선교비를 지원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도해주십시오"라고만 대답했다. 검찰청장님은 전도집회를 20여일 앞둔 5월31일 20여명의 크리스천 기관장과 함께 '고넬료회'를 창립하고, 여수성시화운동 집회를 적극 후원해줬다.

남해안의 작은 도시 여수가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복음의 성지로 세워지고 있었다. 김준곤 목사님을 모시고 1982년 6월 21∼23일 여수제일교회에서 열린 제1회 여수성시화운동 집회에는 연인원 7200여명이 참석, '예수시'를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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