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 칼럼] 멋진 이웃,일본을 기다리며 기사의 사진

#1

미국 하와이 오하우섬에 있는 진주만에 갈 때마다 관심 갖고 살피게 되는 것 하나. 방문객센터나 기록영화 상영관, 애리조나 메모리얼로 가는 페리호 선상 등에 일본인이 있나 없나? 답은 당연히 '없다'다. 일본계 주지사와 연방의원까지 배출하고 상권까지 장악하고 있지만, 하와이 거주 일본계나 하와이를 찾는 수다한 일본 관광객들에게 진주만은 '금단의 영역'으로 묵계(默契)된 지 오래다.

#2

매년 8월 초가 되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벌어지는 원자폭탄 피해자들의 집회가 외신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 나간다. 그들은 스스로 태평양전쟁의 희생자로 자임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설파한다.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3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 경찰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는 그곳에선 매주 수요일 태평양전쟁 종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와 그분들을 옹호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진다. 지난 1993년 시작된 수요시위는 조만간 900회 돌파를 앞두고 있다. 일본 정부가 묵묵부답인 가운데 시위대열에서 이따금 일본 지식인과 청년들을 볼 수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4

워싱턴DC 국회의사당과 뉴욕 유엔본부에선 상반된 풍경이 연출되곤 한다. 국회의사당에서 종군위안부 결의안이 발의되면, 일본을 대리한 로비스트들이 저지를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한다. 그런가 하면 매년 가을 유엔본부에선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일본의 로비가 치열하다.

“집권 드라마처럼 극적인 역사 인식 전환으로 진정한 대국 되기를 바란다”

얼핏 서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앞의 상황들은 기실 밀접한 상관성을 갖고 교묘하게 얽혀 있다. 바로 일본 과거사에 관한 것이다. 해묵은 담론을 다시 꺼낸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이 전후 최초로 확실한 정권 교체를 이뤄낸 쾌거를 목도하면서다.

일본을 반 세기 넘게 통치해온 자민당 체제는 국가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방식이야 어쨌든 전쟁의 폐허 위에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국력이 강해지면서 국제사회에의 기여도 커졌다. 유엔분담금을 비롯, 세계문화유산 복구예산, 일본국제협력기구(JICA)의 대외 공여 등은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일본을 대국으로 존경하는 분위기는 좀체로 조성되지 않고 있다. 자민당 정권이 일관되게 견지해온 과거사 외면과 그로 인한 독불장군식 태도 때문이다. 옛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의심케 하는 헌법 개정 시도 역시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정권 교체로 일본의 변화가 불가피하게 됐다. 대외 정책에서도 급전환이 예고되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새 정권도 그런 각오를 도처에서 피력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 흐름에서 벗어나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역내 협력체제인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하고 그 중심에 한·일 관계 신뢰 정립을 두겠다고 했다. 국제분쟁에 유엔이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국제긴급경찰대' 창설 제안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대외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하토야마 새 정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행보는 역시 과거사 정리일 것이다. 명목상이라고 하지만 천황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으로서 결코 쉽지 않은 결행일지 모르지만, 올바른 과거사 정리 없이 일본이 벌이는 국제사회의 어떤 기여도 그 순수성을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젠 호주 정부가 올해 안에 학대, 소외, 차별 등을 받은 어린이 50여만명을 지칭하는 '잊혀진 호주인'에 대해 공식 사과키로 방침을 세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작년 2월 호주 원주민에 대한 역사적 잘못을 처음으로 공식 사과한 데 이은 것이다.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가 세웠던 자민당 집권 체제를 무너뜨린 멋진 아이러니처럼 하토야마 차기 총리가 과거사를 말끔하게 정리하기 바란다. 대한민국도 정말 멋진 이웃 하나 갖고 싶다.

윤재석 논설위원 jesus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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