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동 칼럼] 장례,그 과잉보도와 감성 과잉 기사의 사진

“취재 보도에 관한 한 기자는 냉정한 구경꾼으로 제자리 지켜야”

무엇이 뉴스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와 학설이 존재한다. 즉, 뉴스의 본질에 관해 통일되고 포괄적인 규정은 없다. 정답이 되기에는 무리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뉴스 정의(定義)는 '새롭고 특별한 것' 정도로 투박하게 압축할 수도 있겠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아니고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다'(로드 노스클립)는 정의는 뉴스이론의 텍스트처럼 회자된다. 이는 뉴스를 내용 측면에서 규정한 것이다. 개가 사람을 물더라도 누가, 왜, 그리고 결과 여하에 따라서는 뉴스가 될 수 있다. 사람이 개를 무는 경우에도 무는 사람의 정신이 온전치 않으면 뉴스가치가 떨어질 것은 물론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제작의 주체 측면에서 본 뉴스 정의는 명쾌하다. '편집장이 자기 신문(방송)에 내기로 결정한 것'(제럴드 W 존슨), '기자가 만든 것'(월터 기버)이 거기 해당한다. 현실적으로 뉴스 여부와 보도 비중, 보도 방식은 언론종사자들이 결정한다. 심하게 표현하면 뉴스가 되고 안 되고는 기자 마음이라는 이야기다. 쌍방향 소통이 강조되는 시대이지만 아직은 미흡한 수준이다.

올 들어 지금까지 '국상(國喪)'이 세 번 있었다. 성직자 한 분과 전직 대통령 두 분의 자리가 컸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분들의 타계 자체가 빅뉴스라는 데도 이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큰 뉴스가 있는 곳에 기자가 몰리기 마련이고, 보도 비중이 큰 것 또한 자연스럽다.

8월 장례까지 포함해 세 차례 국가적 대사는 대다수 국민의 기억에서 벌써 까마득해졌다. 고인에게 결례가 될 수 있고, 상대적으로 애통함이 큰 분들에게도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칠 위험을 무릅쓰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장례에 관한 제(諸)문제는 정부와의 협의사항이지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목도했던 대로 성직자 한 분의 장례는 다른 두 분의 경우와 확연히 구별됐다.

두 분 대통령의 경우 주변에서 국(민)장을 요구했을 때 스스로도 원칙에 허술한 현 정부의 운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결론난 것은 필연이었다. 죽은 자에게 한없이 관대한 국민 심성 위에 상업주의 저널리즘까지 얹혀져 그 장례 관련기사는 신문 방송 가릴 것 없이 거의 무제한 확대재생산을 반복했다. 사실 전달, 해설, 논평기사의 구분은 없어 보였다. 어느 보도나 최상의 수사(修辭)로 국민 감성을 파고들어 '무흠 영웅' 신화·전설 만들기에 열중했다. 그 양태는 더러 횡포에 가까웠다. 장례 피로증을 토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장례기간에 방송의 오락프로그램 편성을 일절 중단하라고까지 요구했다. 왕조시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고집이었다. 배경은 차이 났지만 언론들은 나름대로 최고조의 조문모드를 견지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잘못됐거나 무리하다 싶은 요구를 언론이 합리적으로 여과하고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찬미 일색 외에 비판적 접근을 스스로 금기시하고 저급한 상업주의 경쟁에 뛰어드는 장례 보도는 저널리즘 탈선이다. 죽은 자에게 예의는 갖추되 기자가 특정인의 장례에 함몰되면 본분을 망각하는 짓이다. 최소한의 균형조차 배제돼 물량 보도 경쟁이 분별없이 판치는 나라를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맹목에 가까운 장례 보도에 이끌려 나라가 최면상태에 빠지다시피하는 곳이 몇 있을까.

장례 보도는 한 인생의 궤적을 경건하고 담백하게 반추(反芻)하는 쪽으로 변화해야 한다. 따뜻한 가슴을 갖되, 그러기 위해 취재·보도에 관한 한 기자는 냉정한 구경꾼으로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예컨대 이는 '정치부 기자'가 '정치기자'와 달라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직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과(功過)가 뚜렷하고 이해집단들과의 사사로운 관계에 얽히기 쉬운 정치 지도자들의 장례 관련보도가 특별히 공정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업적뿐 아니라 과오까지도 후대에 자산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편집인 jerome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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