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성영 (21) 섬마을서 춘향전 ‘사랑가’로 복음 전해

[역경의 열매] 김성영 (21) 섬마을서 춘향전 ‘사랑가’로 복음 전해 기사의 사진

1987년 장로가 되고 그 이듬해 여름 날.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리던 칠순의 김 집사님 장남이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상가를 찾아갔더니 대문 앞에서 몇 명의 성도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고인이 생전에 교회에 등록하지 않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장례예배를 드려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김 집사님과 성도들이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조용히 타일렀다. 그리고 "괜찮다면 제가 장례예배를 인도해도 될까요"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사님은 "장로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난생 처음 상가에서부터 시립 공원묘지까지 입관·발인·하관예배를 인도했다. 장로가 되고부터 나는 늘 마음 한쪽에서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 대답은 한결같았다.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

한번은 정성규 담임목사님의 부탁으로 여천군 남면 두라리에 있는 대두교회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다. 그 교회를 담임했던 목사님이 자녀교육 문제로 섬을 떠난 뒤 수개월째 후임자를 찾지 못해 교회가 '표류' 중이라는 것이다.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섬 교회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 2시 여수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두라리에 도착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인 장남이 전속 간호인으로 동행했다. 섬 비탈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집들과 초라한 교회당의 십자가를 보고 있자니 사도 바울의 유배지 밧모섬이 생각났다.

대두교회 윤 장로님은 오랫동안 비워둔 목사님 사택에 손님이 왔다고 군불을 피워놓으셨다. 그날 밤 아들의 도움으로 옷을 벗고 나란히 잠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들도 나도 온 몸이 가려워 잠에서 깨어났다. 불을 켜보니 벼룩이 새카맣게 몰려 있었다. 아들은 나의 옷을 먼저 털어주고 입혀주었다. 그리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발 아래 벼랑끝 바닷가에선 파도가 철썩거렸다. 그날 밤 우리 부자는 교회당 장의자에서 철야기도를 했고, 나는 새벽기도회까지 인도했다. 주일 낮 예배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윤 장로님이 "오랜만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사흘만 더 예배를 인도해주실 수 없으세요"라며 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아들은 당장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데…. 장로님의 간절한 부탁을 뿌리칠 수 없어 결국 아내가 섬으로 들어와 아들과 교대했다. 그리고 나는 사흘 동안 부흥회를 인도했다. 성도라곤 60, 70대 노인 열명 남짓. 무슨 말씀을 전할까. 나는 춘향전의 '사랑가'를 구성지게 불렀다.

"사랑 사랑 내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양반집 아들 이도령과 기생집 딸 춘향이가 사랑을 했더랍니다. 그런데 둘이는 영원한 사랑의 약조를 맺고 이별을 했더랍니다. 남원골 변사또가 춘향이를 유혹하고 핍박도 했지만, 춘향이는 일편단심 오직 예수 이도령만 믿고 참고 기다렸답니다. 한양 갔던 이도령 처음 오실 때, 구걸하는 거지처럼 오셨답니다. 암행어사 이도령 다시 오실 때, 어사출두 여봐라 이리 오너라. 구세주 예수님 처음 오실 때, 가난뱅이 목수 아들로 오셨답니다. 심판주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천군천사 나팔 불며 꼭 오신답니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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