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영미] 정치인이 춤을 출 때 기사의 사진

미국 ABC TV 리얼리티 쇼 '유명 인사와 춤을'은 지난 시즌 회당 평균 2000만명이 시청한 인기 프로그램이다. 전직 복서, 올림픽 메달리스트 등 각계 유명 인사가 직업 댄서와 짝을 이뤄 볼룸댄스 실력을 겨루는 댄스배틀 쇼. 한국에서 '반칙왕'으로 불리는 쇼트트랙 선수 안톤 오노, 폴 매카트니(전 비틀스 멤버)의 전 부인 헤더 밀스가 이 프로에서 유명세를 탔다. 올 가을 시즌9를 맞는 '유명 인사와 춤을'에 메가톤급 스타가 등장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이끈 '텍사스 사단' 핵심 인사였던 톰 딜레이(62) 전 공화당 하원의장이다.

21년간 하원의원으로 재직한 그는 '해머'로 불린다. 당론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망치로 두들기듯 군기 잡고 정적에겐 무차별 보복을 가한다고 해서 얻은 별명이다. 거래에도 능했다. 지역구 반대가 심한 법안의 경우 찬반을 헤아린 뒤 순번을 정해 소속 의원들에게 반대표를 배분했다. 로비스트 잭 아브라모프 스캔들에 연루돼 2006년 하원의장직을 내놓기까지 딜레이 전 의원은 정계 최고 실력자였다.

그랬던 그가 TV 카메라 앞에서 차차차를 추겠다고 결심했다. 워싱턴은 놀라움으로 술렁였다. 제작진이 그를 캐스팅한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치인과 춤은 의외의 조합이어서 매력적이다. 현직 의원은 바쁘고 낙선 의원은 곤란하니 전성기에 부패 스캔들로 낙마한 전직 하원의장이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딜레이 전 의원이 출연을 승낙한 속내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빨이 빠졌다고는 하나 그는 거물이었고, 리얼리티 쇼는 연예인에게조차 피하고 싶은 최후의 선택으로 여겨진다. 선정성 논란 때문이다.

딜레이 전 의원은 "그저 춤을 추면서 즐기려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 언론은 액면 그대로 믿는 분위기는 아니다. 62세가 신인 댄서로는 고령이지만 정계 은퇴에는 이른 나이다. 정치인이 반짝이 무대복을 걸치고 탱고를 출 때는 할 말이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미국인들은 그렇게 짐작하고 있다. 한 정치 평론가는 주간 타임에 "자신이 괜찮은 인간이란 걸 유권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계복귀 신호라는 얘기다. 지금 그에게 절실한 한 가지가 있다면 부패 정치인 이미지를 탈피하는 것이니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나라별로 정치인의 어법에는 차이가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자크 시라크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며 "이제부터 파리 시내를 한가롭게 산책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겠다"고 말했다. 보도가 나간 뒤 파리 정가는 들끓었다. '정치에 계속 간섭하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총리가 되기 전 알랭 쥐페가 저서를 통해 베네치아에서 사색에 잠기고 싶다고 털어놓았을 때도 프랑스 언론은 '쥐페가 출마를 결심했다'고 떠들어댔다. 그건 정녕 프랑스식 어법이었다. 미 주간 뉴요커 에세이스트 애덤 고프닉이 말했듯 '야심 있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정치가 싫은 이유를 책으로 써야 하는' 프랑스에서 산책과 사색은 정치의 동의어였다.

한국 정치인은 어떤 어법을 구사할까. 백의종군을 선언하거나 미국으로 훌쩍 공부하러 떠날 것 같다. 그걸 포기와 은퇴로 읽을 만큼 우린 순진하지 않다. 경험이 가르쳐주길, 무욕의 언어 속에는 권력욕이 꿈틀댄다. 그런 의미에서 '엔터테인먼트 왕국' 미국에서 TV 출연은 가장 미국적인 정치재개 선언일 수도 있겠다. 현직에게 '오프라 윈프리 쇼' '새터데이나이트 라이브'가 있다면 부패한 전직 정치인에겐 리얼리티 쇼가 안성맞춤이다.

댄스 플로어에 뛰어든 전직 하원의장의 목표는 순수하게 춤일지 모른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성공하고 인기가 오른 뒤에도 그가 계속 워싱턴 아웃사이더로 남을지는 의문이다.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제 '정치인 딜레이'의 운명은 '댄서 딜레이'의 스텝에 좌우될 모양이다.

이영미 국제부 차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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