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재운 대기자의 세상보기] 김준규 총장에게 박수를 기사의 사진

인사자료서 출신지역·학교 삭제

학벌중심 병폐 바로잡는 계기로

대학생 딸아이한테 들은 고교 시절 급우 이야기. 엄마의 극성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공부가 시원찮았던 모양이다. 엄마는 아들을 대학에 보낼 방법을 궁리하다 지체장애아를 집으로 데려와 돌보기로 했다. 대학입시에는 자원봉사 점수가 있는데 보통 60시간을 채우면 기본점수가 주어진다. 하지만 자원봉사를 많이 한 봉사활동 우수자를 대상으로 특별전형을 하는 대학도 70여곳에 이른다. 입시생들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구청 등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그 시간만큼 확인도장을 받는데, 복지시설에서 장애아를 데려와 돌보면 주말의 경우 하루 24시간씩 인정받는단다.

문제는 그 집 아이한테 있었다. 장애아가 징그럽다며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나. 밤에 학원을 마치고도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장애아가 잠들면 들어가고 주말에는 아예 친구 집에서 잤단다. 결국 봉사활동은 엄마 몫이었다. 아들은 장애아를 전혀 돌보지 않았고, 목욕이며 식사 수발 등은 엄마가 다 해냈다. 이 어머니, 칭송을 해야 하나 비난을 해야 하나.

대학으로 가는 길.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처절한 투쟁이다. 사교육 투자는 가계지출의 0순위고 수험생이 있는 집의 아버지는 TV를 볼 때도 소리를 죽이고 화면만 봐야 한다. 모든 것이 입시 모드다. 어머니는 티끌만한 정보라도 하나 더 얻으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한다. 신종 플루 비상에도 불구하고 입시설명회장은 마스크로 무장한 어머니들로 인산인해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탓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어머니는 정답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최종 학력에 따라, 그리고 동일 학력이면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사회적 차별이 구조화돼 있다. 그러다 보니 고교생의 대학진학률이 무려 84%로 세계 최고 수준이고 좀 더 이름 있는 대학을 가려고 재수, 삼수를 마다 않는다. 이는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입시과열과 사교육 열풍을 몰고 온다.

예전에 비해서는 바뀐 것도 사실이다. 명문대 나왔다고 평생을 보장받는 시대는 지났고, 선호도가 대학 타이틀에서 학과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대학 브랜드가 갖는 메리트는 적지 않게 희석됐다. 하지만 출신 대학은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소위 명문대를 중심으로 동문 챙기기가 성행하고, 동문들 모임에서는 이것이 마치 '미덕'인 것처럼 이야기된다. 현 정부 들어 특정 대학 출신들이 공공기관 등의 요직에 많이 기용되고 있다. 공평무사의 모범이 돼야 할 정부조차 이러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김준규 신임 검찰총장이 검찰 인사자료에서 출신 지역과 학교를 모두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김 총장은 지난달 27일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검찰 내 지연과 학연 문화를 없애기 위해 검사 데이터베이스(DB)에서 출신 지역과 학교를 삭제토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 총장의 이 같은 발언을 두고 일각에서는 '쇼'에 그칠 것이란 시각도 있다. 하지만 힘든 일을 시작할 때는 어차피 의구심이 뒤따르는 법. 일단은 김 총장에게 박수를 보내고 지켜볼 일이다. 어차피 큰 틀의 개혁이 어려우면 이렇게라도 조금씩 바꿔나가는 수밖에 없다. 법무부 장관이 김 총장과 뜻을 같이해 새로운 문화 정착에 법조계가 앞장서줬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지연이나 학벌, 학연보다는 능력 위주로 인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조직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출신 학교와 업무능력의 상관관계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관행이 고쳐지지 않는 것은 거기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 이것도 바로잡으려면 결국은 기득권 세력, 즉 학벌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의 양보가 필요하다. 정부는 사교육을 잡겠다고 별의 별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학벌중심 사회가 지속되는 한 사교육은 영원할 가능성이 크다.

수능이 다가오면서 오늘도 전국 사찰에는 100일기도를 올리는 어머니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기도 명부에 자녀 이름을 올리는 가격만 수십만원이란다. 그리고 어머니는 열심히 기도를 올린다. 다른 아이들은 다 떨어져도 좋으니 제발 내 아이만은 좋은 대학에 가게 해 주소서….

jwb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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