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돈이 보일 때 투자합니다. 확실하다 싶으면 빚을 내서라도 하죠. 유능한 CEO의 첫 번째 소임은 투자할 곳과 시기를 잘 가리는 것입니다."



모 대기업의 고위 임원이 사석에서 한 말입니다.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정부와 언론이 닦달하는 데 대한 해명입니다. 최고경영자(CEO)의 판단 미스가 기업에 얼마나 큰 재앙을 몰고 오는지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습니다.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기업이 돈 버는 데 실패하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우리는 쌍용자동차 등 법정관리 기업들을 통해 많이 봐왔습니다.

기업의 투자가 영 부진하자 한나라당까지 법인·소득세 추가감면을 2년간 유예하자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당초 감세정책의 명분이 기업의 투자 유도였는데 그게 아니라면 다시 바꿔야죠. 지금 대기업은 그렇지 않아도 최고의 호시절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증시에 상장된 시가총액 상위 100대 기업의 유보율은 2000%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투자 유도를 위한 감세라니요? 더구나 지금은 용처에 비해 세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내년 예산안을 짜는 기획재정부 윤증현 장관이 딱하고 애처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정건전성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데 대선 공약대로 감세는 해야겠지, 4대강 살리기에는 천문학적 예산이 투입되지, 국방예산을 둘러싸고 장관이 편지를 보내지 않나, 대통령이 중도실용으로 돌아섰으니 서민복지에 신경을 써야겠지….

현 정부가 안고 있는 몇 가지 '경직성'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4대강 사업은 역린(逆鱗)이니 건드릴 수 없고, 부동산 관련세 강화는 참여정부 유산이니 다시 쓰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을 안하고, 부자 증세는 자칫 지지기반을 잃을 수도 있고 하니 무엇하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정부가 감세를 강행하고 그것이 기대한 대로 투자확대와 경기진작의 선순환 효과를 가져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 정부는 재정악화의 주범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이겨낸 것은 앞선 정권들이 만들어 놓은 비교적 안정된 재정여건 덕분에 확대 재정정책을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잔뜩 쓰기만 하고 빈 곳간을 다음 정권에 물려주면 되겠습니까.

윤 장관은 지난달 13일 국회에서 감세 유보 의사를 묻는 의원들의 질문에 "만고불변의 성역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변재운 경제대기자 jwb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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