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재서 (3) 글 배울 생각으로 맹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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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여름. 형은 내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지 않겠다고 했다. 병원비 대느라 집에 부담을 준 것도 미안한데 다시 돈이 들어가는 학교에 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희망도 의욕도 상실한 내게 학교는 의미가 없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도저히 실명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앞 못 보는 사람들 속에 섞일 생각을 하니 속이 탔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혹시 거기에 가면 무슨 글자가 있을까?"

며칠 후 형에게 그걸 물었고, 형이 글자가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하자마자 곧 학교에 가겠다고 말했다. 고통스러운 날들을 글로 쓴다는 것, 그것이 내가 서울맹학교에 간 동기였다.

아버지는 반대했다. 앞이 안 보이는 애를 서울까지 보내 어쩌자고 그러느냐고 그냥 점치는 것이나 가르쳐 보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형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재서를 이대로 둘 순 없어요. 앞 못 보는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곳이 있다고 하니, 거기에 보내 뭔가 살 길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형의 말에 어머니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자"며 동의해 주셨다. 반대하시던 아버지도 결국 동네에서 돈을 빌려 형의 손에 쥐어주셨다.

형의 손을 꼭 잡고 서울맹학교를 찾아갔다. 형이 교무실에서 입학 절차를 알아보는 동안 나는 밖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합창 소리가 들렸다. 학교에서 배운 '그집 앞'이란 노래였다.

"누굴까? 혹시 앞 못 보는 아이들? 일반 학교 아이들이 왔나?"

잠시 후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며 웃어댔다.

"저 아이들도 너처럼 앞을 못 보는 아이들이야."

형의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런 처지에 노래를 부를 수가 있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 저 아이들은 좀 모자라는 것이 분명해. 그러니까 저런 상황에도 노래를 부르지, 후…."

그것이 바로 당시 마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세상이 그 안에 존재할 것이라는 예감이 문득 스쳐갔다. 이 때 형이 말했다.

"재서야. 지금은 학기 중간이어서 입학할 수가 없대. 점자를 배워 내년에 시험을 치러야 한다네. 시험 때까지 점자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소개받았어. 그곳으로 가자."

67년 9월, 형과 함께 찾아간 곳은 서울 천호동 '오암원'이라는 기독교 기관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먹는 비용만 지불하고 입학할 때까지 머무르며 점자를 배우도록 허락 받았다. 점자를 배우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처음엔 글자 한 자를 손가락 끝으로 알아내는 데 1분도 더 걸렸다. 한 달쯤 지나니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됐고 두 달째는 점자로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점자를 배우며 나는 시각장애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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