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 칼럼] 잊혀지는 한국전쟁 흔적 기사의 사진

취재 차 이 나라 저 나라를 방문할 때 흔히 맞닥뜨리는 것이 있다. 반세기 전 한반도를 휩쓸었던 한국전의 흔적이다.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야 워낙 사람의 발길이 잦은 곳이라 그렇다 치고 다른 주요 도시에서도 수다한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그중 작년 여름 국제회의 참석 차 태국에 갔을 때 목도한 흔적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수도 방콕 시내에 있는 왕실경호 제21보병연대 한켠엔 잘 정돈된 참전기념관이 있었다. 알고 보니 태국은 한국전쟁 당시 제21보병연대 제1대대 장병 1294명을 비롯해 육·해·공군 2274명을 보내 134명이 전사 또는 실종됐고, 1139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기념관에서 인상 깊은 유품을 목도했는데 바로 두꺼운 외투였다. 그 밑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용맹스런 태국군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인민군도 중공군도 아닌, 엄혹한 추위였다.'

한 달 내내 과학기술 경쟁력 취재를 위해 방문한 호주 곳곳에서도 한국전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수도 캔버라의 전쟁기념관에는 호주군이 참전했던 양차 대전과 말레이 보루네이 전, 베트남전과 함께 한국전 부스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시드니 무어파크에선 지난 7월 개막된 참전 기념비를 볼 수 있었다. 태극 모양의 원형 구조물 안에 깃대 모양의 석재 136개가 들어선 참전비의 석재가 호주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경기도 가평에서 공수돼 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G20 개최국 선정이 자랑스러운 만큼 한국전 참전국에도 관심 가져야”

한국전과 관련,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남부 태즈메이니아섬의 로스라는 내륙 마을에 남아 있는 흔적이었다. 인구 2000명 남짓의 이 마을 한복판엔 멋진 군인 동상이 서 있었는데 발 밑엔 몇 개의 동판이 박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이 마을 출신 청년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 그 다음에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의 이름이 새겨진 명패도 있었다. '상병 하드리스 W.A. 일병 퍼킨스 B.C.'

시드니에서도 비행기로 두 시간을 타고 내려온 주도 호바트에서 다시 세 시간 가량 들어가야 하는 오지 마을 청년 두 명이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호주는 한국전이 발발하자 육군 병력은 물론 항공모함 1척, 구축함 2척, 프리깃함 1척 등 해군 함정과 전투비행 1개 대대, 수송기 1개 편대 등을 참전국 중 가장 먼저 투입해 정전될 때까지 1만8000명 가까이 참전해 339명이 전사하고 1216명이 부상했다.

전쟁이 끝나고 생존한 한국전 참전 퇴역 군인들의 건강 상태는 상당히 열악하다고 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우울증과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암 등 갖가지 난·불치병이 일반인보다 3배나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한국전 참전 호주 퇴역 장병에게 해주는 것은 고작 한국방문 프로그램, 그것도 제한된 인원 내에서일 뿐이다.

지난주 유엔본부 기후변화 정상회의와 피츠버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대한민국의 드높아진 위상이 확인된 자리였다. 하지만 이처럼 지구촌 곳곳에 남아 있는 한국전의 흔적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가 과연 스스로의 높아진 위상에 걸맞은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동양의 손바닥만한 반도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을 잠재우기 위해 불원천리 달려와 고귀한 피를 바쳤던 고마운 이웃을 우리는 당연한 듯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16개 참전국과 인도지원 5개국을 다시 한번 꼽아 본다. 미국 영국 호주 프랑스 캐나다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 그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이상 참전국) 인도 이탈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상 인도지원국).

시드니=윤재석 논설위원 jesus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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