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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식물 이야기] 죽어도 죽지 않는 나무

[고규홍의 식물 이야기] 죽어도 죽지 않는 나무 기사의 사진

백년도 못 사는 사람이 천년 넘게 사는 나무의 수명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나무에도 수명은 있다. 나무도 죽는다. 태풍이나 벼락,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못 이겨 죽기도 하고, 해충의 공격으로 죽을 수도 있다. 또 주어진 명을 다하고 자연스레 죽는 나무도 있다.

싱그럽게 펼쳤던 나뭇가지나 푸른 이파리 하나 없이 시커멓게 썩은 줄기만으로 서 있는 나무를 고사목(枯死木)이라 부른다.

퇴계 이황이 어린 시절 글공부하던 봉화 청량산의 청량정사 앞에는 오래 전에 죽은 느티나무 고사목이 있다. 시커멓게 썩은 줄기는 어른 서너 명이 둘러서야 겨우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굵고, 높이도 8m를 넘는다. 오붓한 숲길가의 고사목은 죽어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융융하다. 곁을 지나는 나그네들은 누구라도 한번쯤 숨을 돌리며 바라보는 나무다.

온갖 생명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산중에서 홀로 깊은 죽음에 빠져들어 고요하다. 미동도 없는 그가 죽음으로써 잉태한 새 생명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까맣게 죽은 나무 줄기를 가만히 바라보면 죽음의 깊은 그늘 안쪽에서 생명의 빛이 환히 보인다. 죽음으로 삶을 키우는 변증의 원리가 서서히 드러난다.

썩어 텅 빈 줄기 안쪽에 작은 생명의 아우성이 한가득 들어찼다. 줄지어 선 개미들이 가느다랗게 이어진 줄기 틈새를 바삐 오간다. 곁에는 정체불명의 애벌레들의 꿈틀거림이 활기차다. 긴 다리를 바짝 세우고 음험하게 거꾸로 매달린 거미는 꼼짝하지 않아도 생기 충만하다.

줄기 바깥에도 새 생명이 찾아들었다. 썩은 둥치 위에는 난데없이 초록의 새 잎이 돋아났다. 고사목 곁을 스쳐지나던 바람이 흘린 씨앗 하나가 썩은 나무 부스러기를 거름으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 것이다. 죽은 나무의 몸뚱이는 그렇게 새 생명의 보금자리가 됐다.

수백 년을 살고 겨우 찌꺼기만 남은 나무는 살아있을 때처럼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른 생명에게 내놓는다.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원리다. 나무는 죽어서도 그렇게 이 땅의 생명을 키운다. 움직이지 않지만 더 많이 움직이고, 보이지 않지만 더 많이 보여주고, 말하지 않지만 더 많은 말을 한다. 나무는 그렇게 죽어도 죽지 않는다.

천리포수목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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