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정수익] 이제는 눈물을 기사의 사진

눈물, 눈물, 눈물…. 매번 그랬듯이, 지난 추석 직전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 역시 눈물의 바다를 이뤘다. 이산가족들은 그간 가슴속에 쟁여온 그리움과 슬픔, 아픔 등을 눈물에 담아 쏟아냈다. 그들의 눈물 속엔 지금이라도 얼굴을 보게 됐다는 안도와 기쁨도 녹아 있었다. 그뿐이겠는가. 대부분 노인이 된 그들은 자신들의 온갖 감정을 눈물로 대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아니, 사람들만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상봉장의 그들에게 굳이 말이 필요치 않았다. 눈물만으로도 서로 마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은 눈물로 표현될 수 있다. 슬픔의 눈물, 아픔의 눈물, 외로움의 눈물, 연민의 눈물, 감사의 눈물, 기쁨의 눈물, 감동의 눈물, 회개의 눈물…. 눈물을 흘린다는 건 자기 감정에 솔직하다는 뜻이다.

한데 사람들은 눈물을 아낀다. 나약하게 보이기 싫어서다. 특히 남자들에게 눈물은 절제하거나 금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된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웃으면 복이 온다'며 웃음은 적극 권하면서 눈물은 애써 말린다. 그러나 체험해본 사람들은 눈물 뒤의 절묘한 카타르시스를 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면 경직된 근육이 풀리고, 침침한 마음이 개운해지고, 탁한 영혼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개인적으로 귀한 체험을 했다. 경기도 일영의 감리교연수원에서 열리는 '엠마오 가는 길'이라는 3박4일 영성수련회에 참가해 원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너나 할 것 없이 40여명의 참가자들은 이야기하면서 울고, 기도하면서 울고, 찬양하면서 울었다. 터진 눈물샘을 제어할 수 없었다. 후회스러워 울다 감사해서 울었다. 슬퍼서 울다 감동에 겨워서 울었다. 나중엔 왜 우는지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눈물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고백이었다. 내 자아가 깨지고 허물어진 상태에서의 항복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성적인 눈, 타산적인 눈, 교만한 눈에서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냈다.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장영희 교수는 생전 스스로를 '눈물의 사람'이라고 하며 눈물 예찬론을 폈다. 그가 병마와 장애를 딛고 57년 동안 옹골찬 삶을 살 수 있었던 데에는 눈물의 위력이 있었다. 특히 그는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위대한 눈물의 사람은 예수님일 것이다. 그분은 때때로 눈물을 흘리셨다. 나사로의 주검 앞에서 그러셨고,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도 그러셨다. 그분은 눈물 없는 사람, 눈물 없는 세대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나무라기까지 하셨다. 그분은 눈물이야말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고, 분노를 용서로 바꿀 수 있는 핵심임을 알려주셨다. 김병종 화백은 국민일보 10일자 '바보 예수' 연작 마지막 회에서 "예수의 눈물은 결코 물이 아니었다. 인류 대속을 위해 흘린 그 눈물은 피에 가까웠다. 생명 그 자체였다"고 밝혔다.

이래도 눈물을 아끼고 금하는 게 온당한가. 이제 눈물 권하는 세상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웃음에 능력이 있다면 눈물에도 그에 못지않은 능력이 있다. 고로 인간은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한다.

북한 측이 이산가족 상봉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눈치다. 앞으로 이 행사가 잘 진행될지 걱정스럽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헤어진 가족들을 끌어안고 펑펑 눈물 쏟을 날을 고대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은데….

정수익 종교부장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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