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동 칼럼] 박정희를 광장에서 만나게 하라 기사의 사진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됐을 때 만세를 불렀다"고 몇차례 밝힌 적이 있다. 그리고는 "만약 박 대통령이 당시 경제학자들이 모두 반대했던 고속도로, 자동차공장, 조선소, 중화학공업공장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지 의문이다"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 1979년 10월 말 박정희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자 만세를 불렀다는 대목에는 '긴급조치' 시대의 어두웠던 정치상황이 농축돼 있다. 김 지사의 이어진 말에서는 학생·재야운동가였던 그가 행정가로서 부닥치는 고뇌들이 짙게 묻어난다.

박정희 18년 통치기간에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서 1644달러로 20배 늘었다. 연간 100억달러 수출 목표를 3년 앞당겨 달성한 1977년 12월22일, 박정희는 이런 일기를 썼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1961년 수출액이 5000여만불이었다. 64년에 1억불이 달성되어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70년에 10억 불, 7년 후인 금년에는 드디어 100억불 목표를 달성했다. 10억불에서 100억불이 되는 데 서독 11년, 일본 16년, 우리는 7년이 걸렸다. 81년에는 200억불이 훨씬 넘고 86년 경에 가면 500억∼600억불이 될 것이다…"(朴正熙의 결정적 순간들, 조갑제 지음·기파랑)

지난해 우리의 교역규모는 총8573억(수출 4220억, 수입 4353억) 달러였다. 불황 속에 올해 예상 수출·입액은 3600억 달러와 3200억 달러로, 세계 10위를 넘나든다. 1973년 박정희가 철강, 기계, 자동차, 조선, 발전, 전자, 석유화학 등을 묶어 '중화학공업 육성 선언'을 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G20 멤버로 세계경제를 더불어 이끄는 한국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도 '한강의 기적'을 이렇게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빈곤으로 허덕이는 곳에 민주주의가 만개한 예가 역사상 있었던가”

한때 '박정희 목을 따러' 특공대를 남파했던 집단에 갖다바친 돈도 땅에서 솟아난 게 아니다. 현재 남·북한의 경제규모는 약 40 대 1. 세종연구소 이종석 연구위원은 2006년 기준으로 북한의 국민총소득(명목 GNI)은 남한의 100분의 1에 불과하며, 1인당 GNI는 약 50분의 1이라고도 주장한다(정세와 정책, 세종연구소).

박정희 비판자들은 개발독재로 규정되는 통치방식과 집권과정을 문제삼는다. 이것이 진보·좌파들만의 발견은 아니다. 좌파 일각에서는 국가융성의 터전을 민중의 피땀이 일궈낸 결실이라며 박정희를 폄하한다. 이는 통념을 벗어난 것이다. 수없이 개발독재가 있었지만 우리 말고는 성공한 데가 없다. 빈곤으로 허덕이는 곳에 민주주의가 만개한 예도 없다.

때때로 그런 사람들에 대해 위선자 평판이 나오는 배경은 그것이다. 인류 역사에 없었고 앞으로는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그래서 세계가 경외하는 압축경제성장의 수혜자이기는 그들도 한가지다. 국민들의 일할 의욕, 즉 '신기(神氣)'에 박정희가 불을 당겼다고 소신껏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거기에 동의하는 우파 지식인들이 독재의 멍에를 의식해 양심있는 척 침묵하는 것도 비겁하다.

박정희 이후 30년. 그들 세대의 숙명이던 가난과 망국, 전쟁을 숨가쁘게 거쳐와 잠자던 민족을 깨운 영웅은 서서히 잊혀져간다. 박정희가 '가장 훌륭했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아직은 있어서다. 수많은 이방인이 박정희 시대를 배우는데도 배부른 우리의 미래세대는 그를 독재자 정도로 인식하고, 어른들은 그의 공과(功過)를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른바 DJP 정권의 대선공약이었던 박정희 기념사업을 들여다 보면 박정희를 처연하게 만난다. 명칭까지 비틀어 서울 상암동의 좁고 구석진 곳에 마련되는 '박정희기념도서관'. 좌파 집권 때는 사실상 정권측의 방조 아래 계획이 무산되기까지 했다.

전직 대통령(들)을 정말이지 융숭하게 예우해온 지금의 정부가 유독 박정희에 대해 시큰둥한 이유는 또 뭔가. 먼저 박정희 기념처소의 위치, 부지, 명칭부터 '국부(國父)' 급으로 새로 정돈하기를 제안한다.

편집인 jerome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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