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유권자의 책임도 생각할 때다 기사의 사진
“국민은 오직 투표일만 자유로울 뿐이다. 투표일이 지나게 되면 곧 노예로 되기가 쉽다.”

장 자크 루소의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유권자가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만의 잔치’를 구경할 수 있을 뿐인 처지라는 점에서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당선자와 그 집단은 승리감을 만끽하면서 성과 챙기기에 골몰한다.(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지레 분노하실 생각은 마시라!) 어떻게 잡은 자리인데 봉사만 하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든다. 유권자들은 언제나 옳고 선량하기만 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선거의 의의는 ‘총탄 대신 투표로써(not bullet, but ballot)’라는 데 있다. 선의를 가지고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유권자’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많은 유권자는 선택권 자체를 특정 인물 혹은 세력의 ‘총탄’으로 헌납해 버렸다. 그 때문에 선거는 집단적 증오심의 상호 표출 과정이 되고 말았다.

선거인은 항상 선량한가

이 같은 선거 결과가 국민적 승복을 이끌어낼 수 있을 리 없다. 선거불복 심리는 집단적 거부감과 증오심으로 표출된다. 선거가 끝나면 화해 화합 협력의 기간이 시작된다는 게 교과서적 믿음이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다음 선거에서 반대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극도로 끌어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선거 종료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피켓이나 촛불로! 그런데도 국가가 발전하고 민생이 유복해진다면 그건 기적이거나 허구다.

민주정치의 본향, 고대 아테네에서는 공직자를 뽑는 방식으로 추첨제가 일반적이었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자질을 갖췄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 제도라 할 수 있다. 공직은 시민적 의무이기도 하다는 인식도 한몫했다. 어쨌든 추첨제는 비열한 편가르기나 집단적 대결 및 증오 구조를 피할 수 있는 장치였다.

스파르타에서는 후보자들에게 보내지는 민회의 박수소리 크기로 공직자를 선출했다. 심사위원들은 수백m 떨어진 곳에 격리된 채 그 소리를 듣고 평가했다. 후보자들은 이름 대신 번호만으로 불렸기 때문에 정실에 따른 편파적 결정을 우려하지 않아도 됐고, 당연히 유권자 간의 집단적 증오심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고대인의 이 지혜가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너무 한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총알을 장전하듯 하는 이런 선거에 의존하기보다는 고대인들의 지혜를 빌리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추첨제가 위험하다면 스파르타식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후보자들이 변조된 음성으로 자신의 포부와 정책을 발표하게 하고, 그것을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심사위원들이 듣고 평가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때로는 이런 농담도 좀 하면서 살자!)

승복과 화해의 축제 돼야

유권자라고 해서 언제나 옳고 선량한 것은 아니다. 후보자(및 정당)와 유권자는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다. 유권자는 순수한데 후보자 및 정당이 타락했다거나 국민은 청렴한데 공직자만 부패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란 거의 없다. 좋은 후보자는 좋은 유권자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좋은 유권자는 좋은 후보자를 만든다.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성립한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팔로어십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유권자는 자유의사와 타협의 정신으로 선택권을 행사하는 사람이어야지 그것을 강요당하는 사람이어선 안 된다. 선거 절차가 끝나면 그 결과에 승복하고, 다시 하나로 화합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민주선거의 책임 있는 유권자일 수 있다. 그런 팔로어들이야말로 민주사회의 진정한 리더들이다.

이진곤 논설고문·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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