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속의 샘] 의리를 갈망하는 시대 기사의 사진
요즘 광고계와 연예계를 휩쓸고 있는 단어는 단연코 ‘의리’다. 전성기를 한참이나 넘긴 마초적인 남성 배우가 수십년간을 입에 달고 다닌 그 단어는 한때 조롱감이자 비웃음거리였다. 시작도 다분히 희화적이었다. 그 남성 배우로 분장한 여성 개그맨이 시도 때도 없이 ‘으리’를 외치며 허공에 연방 주먹을 휘둘러댔다. 우스꽝스러운 이 헛주먹질이 사람들의 웃음 코드를 제대로 한방 먹였는가 싶더니 어느새 ‘의리’는 시대의 유행어로 급부상했다. 엉뚱한 시작치고는 으리으리한 결말이다.

얼렁뚱땅 일어난 의리의 바람이지만 순식간에 잦아들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단번에 광고계에 돌풍을 일으켰고,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선거 캠프를 접수하는가 싶더니 여당 대표를 꿈꾸는 정치인의 입에서도 일성으로 터져나왔다. 이 의리의 열풍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의리 열풍을 일으킨 배우는 놀라면서도 즐거운 표정이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의리에 대한 열풍을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 정의에 대한 목마름 때문일 것이라는 요지로 대답한 일이 있다. 그의 말에는 지나쳐버리고 말기엔 개운치 않은 일말의 진실이 있는 듯하다. 쓴웃음이나 자아내던 식상한 말이 정의와 신뢰가 사라진 시대에 대중의 마음 깊이 가려져 있던 양심의 건반을 두드린 것이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마초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남자 배우가 외치는 의리에는 삼류 건달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 그가 사용하는 의리의 어감은 그가 말한 ‘정의’라든지 ‘바른 도리’라고 하는 사전적 해석과 다소 차이가 난다. 그뿐만인가? 우리 역시 꼭 정의를 찾아야 할 곳에서 의리를 외치지는 않는다. ‘참 의리 없는 놈’이라는 말이 쓰이는 자리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실 의리는 윤리적인 옳고 그름보다는 정서적인 유대 방면으로 치우쳐 있는 말이다. 의리가 지니는 패거리 정서의 속성이다.

동양의 사유나 도덕론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강력한 저력을 잃고 있지 않은 단어를 꼽으라면 인의(仁義)를 들 수 있겠다. 인(仁)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천성적인 사랑이라면 의는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반듯하게 잡아주는 도덕적 벼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인간관계의 벼리는 남을 존중하고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마음에 기초하여 반듯함을 유지한다. 여기에서 의리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의리란 말이 왜 본래의 의미와 사뭇 다르게 변했을까.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역량 있는 정치가로 섭공이란 인물이 있다. 그가 공자를 만났을 때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백성들이 얼마나 정직한 사람들이 되었는지 하나의 예를 들었다.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그의 아들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정직하고 정의로운 아들을 보았나?

공자에게 이 말은 경악에 가까웠다. 혈친의 죄를 스스럼없이 고발하고 증언하는 것이 정의와 의리가 되다니. 공자는 섭공에게 혈친 간에는 죄를 알더라도 숨겨주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사랑과 관용으로 건강한 도덕사회를 만드는 것이 참된 의리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올바른 정직과 바람직한 의리는 사랑, 곧 부자상은(父子相隱)이란 가족적 정서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다고 공자는 보았던 것이다.

공자의 말이 가족 간의 비리를 눈감아 부정을 조장하란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로 숨겨준다’는 말에 가족 이기주의와 패거리주의로 갈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마련되어 있다고 본다. 사람들이 모두 공자처럼 도덕군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동양사회에서는 조직 내에서의 양심선언이 배신의 다른 말로 읽히고 있다. 일본어의 우라기리(裏切り)도 그러한 정서가 반영된 말이라 생각된다.

참된 사랑과 관용으로 건강한 도덕사회를 만든다는 애초의 정신이 쇠퇴하면서 그에 따라 의리는 패거리 정서의 성격으로 전락했다. 조선만 해도 정몽주나 사육신이 보여준 초기의 그 삼엄한 의리정신에 비해 후기로 넘어오면 겨우 당파적 유대를 확인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정치적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이것이 하급계층으로 확장되면서 검계와 같은 폭력조직과 만나 통속성을 띠고 근대 이후 오늘까지 전해져 왔다. 안타깝게도 지금 정치권에서 운위하는 의리 역시 이러한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리는 매력적인 말이다. 아니 그리운 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극단적인 의리가 아니어도 좋다. 믿음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의리는 신뢰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변해가는 시대에 의리는 변치 않는 가치를 지켜줄 것이라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의리를 외치는 오늘, 그렇기에 세상은 날 선 정직함으로 분노하기보다 다시 한번 큰 사랑으로 포용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그 속에 진짜 의리가 꽃피울지 모르는 일이다.

이규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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