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기석] 희망의 죽음 기사의 사진
지난 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이었다. 전쟁과 테러, 인종, 종교, 정치적 신념의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난민들의 고통에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해를 증진시키자는 취지로 제정된 날이다. 문제는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극심한 가난을 피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려는 이들의 행렬이 점점 늘고 있다.

잠시 이탈리아에 머물고 있는데 최근 며칠 사이에 신문들은 바다를 통해 입국하려는 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이들도 있지만 사하라 남부에서부터 먼 길을 떠나온 이도 많다고 한다. 더러는 사막에서 죽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는 자기 땅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희망의 여로서 죽어가는 난민들

튀니지나 리비아의 어느 항구에서 떠나 이탈리아 최남단 섬 람페두사에 이르는 길을 그들은 ‘희망의 여로’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항해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작고 낡은 배에 기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타기 때문이다. 배는 람페두사에 당도하기 전 난파되기도 하고, 또 일부러 전복시키기도 한다. 더 많은 돈을 내고 갑판에 있던 이들은 구조될 가능성이 많지만 기관실이나 화물칸에 있던 이들은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로마에 있는 가톨릭교회, 개신교회, 정교회는 매년 난민의 날을 맞을 때마다 난민들을 기억하기 위한 기도회를 개최한다. 올해도 기도회가 열렸지만 일정상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몇 해 전 열렸던 기도회 자료를 열람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산타마리아교회에서 열린 이 기도회의 주제는 ‘희망의 죽음(Morire di Speranza)’이었다. ‘살기 위해 유럽으로 향했으나 결국 생명을 잃고 만 이들을 기억하는 일치의 기도회’라는 부제가 이 기도회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기도회의 주제는 희망의 여로가 희망의 죽음으로 변하는 현실을 충격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기도회를 알리는 포스터 그림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다. 하늘에는 천사가 날고 있고, 사막 위로는 사람을 잔뜩 태운 트럭이 달리고 있다. 힘겨울 텐데도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다.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 위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앉은 배가 항해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현실의 재현이다. 그런데 이 포스터에는 제3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기를 품에 안은 여인이 나귀 등에 앉아 있고, 가방을 멘 남편은 뒤를 따른다. 바로 성가족이다. 포스터를 제작한 이는 가난과 위험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서 성가족의 모습을 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절망적이다. 그 모임에 전시되었던 사진 한 점이 그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검은 바다, 물에 빠진 검은 피부의 사람, 공포에 질린 눈빛. 기도회 도중에 인도자는 죽어간 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호명해 나갔다. 그 때마다 죽은 이를 아는 이들이 나와 초에 불을 밝혔다. 하나 둘 촛불이 밝혀질 때마다 실내는 조금씩 밝아졌다. 마침내 촛불이 수백 개에 이르렀을 때 실내는 환해졌지만 슬픔의 무게가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탈북민 맞는 자세 돌아봐야

기도회를 마칠 무렵 그들은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를 함께 불렀다. 절망 중에도 여전히 그분은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죽음을 면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추방되지만, 대개는 체류허가증을 발급받아 이탈리아에 머문다고 한다. 비록 불법체류자라 해도 의료나 교육서비스에서 배제되는 일은 없다. 이탈리아의 사회 시스템 속에는 기독교 정신이 배어 있는 것이다. 탈북 난민들과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맞아줄 것인가? 그들의 존재는 한 사회의 성숙성을 재는 척도인지도 모른다.

김기석 청파감리 교회 담임목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