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병삼] 비극 앞에서 문명을 말한다 기사의 사진
최근 들어 인류는 말할 수 없는 비극을 많이 경험하고 있다. 과거보다 더 많은 사건이 터지는 것인지 그 전달의 속도가 빠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계속되는 재앙 앞에서 ‘과연 인류는 문명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청결지수나 편리지수 같은 것으로 문명을 논하기에는 힘든 일이 문명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이제는 선진국에 진입한 문명국이라고 자부하던 대한민국에서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며칠 전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육군 부대에서는 총기 사건으로 5명이 죽고 7명이 부상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문명이 더는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고, 진정한 문명사회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나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끊이지 않는 기근과 사고, 죽음의 현장을 보며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이 고통의 문제 앞에서 필립 얀시는 최근에 출간된 책 ‘하나님 내게 왜 그러세요?’에서 신학적 답변을 시도하는데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녀는 강의실에서 종종 학생들에게 묻는다. “문명의 최초 징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람의 대퇴골을 보이며 손가락으로 뼈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그것은 골절이 된 후 치료하여 더욱 강해진 부분이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치료된 뼈는 싸움만을 일삼았던 인류 초기 사회의 유골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런 유골에서는 폭력의 징후가 보입니다. 예를 들면 화살이 관통한 갈비뼈나 곤봉에 맞아 깨진 해골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이 치유된 뼈는 누군가가 부상당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걸 말해줍니다. 부상자를 대신해 다른 사람이 사냥을 하고,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자기 시간을 희생해 돌봤기 때문에 그의 뼈가 회복된 것입니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과 달리 인간은 가장 약하고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문명의 척도로 삼는다. 기독교적 가치관은 고난과 고통에 대한 원인을 찾기보다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을 당한 이들을 찾아 함께한다.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신약의 거의 모든 기록은 ‘고통의 원인’에서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강조점을 옮긴다.

최근 발생하는 재앙을 보면서 문명의 척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문명은 재앙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고통당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누구에게선가 원인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죄의 결과이든. 이러한 시도는 아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을 가다 만난 맹인을 놓고 이런 논쟁을 벌인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누구의 죄인가?” 사람들은 이렇듯 누군가의 고통을 보면서 고통의 이유를 찾는다. 원인이 있으면 그 사람의 아픔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맹인의 고통을 죄의 결과로 바라보는 제자들과 달리 그 맹인이 당하는 아픔에 초점을 맞추신다. 그 맹인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인류를 문명으로 이끈 그런 문명된 세상에서 살고 싶다. 책임이 중요하지만 문명인들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지 않는 책임은 비문명적인 잔인함이다.

쉐인 클레어본의 책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칭찬을 받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살면 십자가에 달리게 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자유함을 느낀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은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김병삼 만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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