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준동] 박지원과 김기춘의 경우 기사의 사진
시계를 12년 전으로 돌려보자. 2002년 7월 장상 이화여대 총장이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다. 하지만 장 총리 후보자는 청문회 과정에서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장남의 이중국적 문제 등이 쏟아지면서 인준안 표결에서 부결된다. 한 달 뒤인 8월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으나 역시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의혹 등에 휘말리며 여소야대 구도 속에서 국회 임명동의를 얻지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임기를 6개월여 앞두고 레임덕에 시달리던 김대중 대통령은 총리 후보자의 잇단 낙마로 치명타를 입는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현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지원 의원이다. ‘왕실장’으로 불린 그를 여론이 그냥 놔둘 리 만무했다. 야당이던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총리 인준안이 두 번이나 부결돼 국정 혼선을 초래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한다. 동시에 검증작업을 주도한 박 실장 해임을 강력히 촉구하기에 이른다. 박 실장 문책 여론이 거셌지만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두 차례 총리 인준이 부결된 8월 30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다. 비서실장 문책 여론에는 이런 말로 갈음한다. “국가적인 소명감을 갖고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노력하고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노력해 주기 바란다.” 비서진에 대한 인책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박 실장도 “비서실은 어느 때보다 일치단결해 대통령께서 국정을 흔들림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보좌하겠다”고 화답한다.

결국 그는 이듬해 2월 대통령 퇴임 때까지 비서실장 자리를 지킨다. ‘처음부터 끝까지’ 측근을 보호한 대가는 컸다. 한때 80%를 넘나들던 김 대통령 지지율은 아들 비리 등과 겹치면서 그해 9월에는 최저치인 30.6%까지 급락했다. 이후 지지율은 회복되지 않았고 국민의 정부는 끝났다. 여론에 반한 결과였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2014년 6월 현재, 12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전관예우 논란으로 총리 후보자 지명 엿새 만에 자진사퇴한 안대희 전 대법관에 이어 문창극 후보자도 역사인식 논란에 휩싸이면서 지명 14일 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두 명의 후보자가 잇따라 낙마하면서 ‘청문회 전 연속 사퇴’라는 헌정 사상 첫 기록도 남기게 된다.

입장만 바뀌었을 뿐 상황은 12년 전과 대동소이하다. 박 대통령의 사과와 김기춘 비서실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야당의 공격이 비등하다. 청와대 인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실장이 사전 검증을 소홀히 해 인사 참사가 발생했다는 논리도 2002년과 똑같다.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대통령의 ‘실장 지키기’도 많이 보던 장면이다. 세월호 참사로 사의를 표명했던 정홍원 국무총리가 60일 만에 유임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일까지 벌어졌다.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12년 전 혹독한 비난을 받았던 박지원 의원은 “김기춘 실장이 사퇴해야 모든 것이 잘 풀린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지지율 추락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때 70%대를 넘나들던 박 대통령 지지율은 하락세를 지속하더니 최근에는 최저치인 44%까지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역시 민심을 등진 결과였다.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시선(詩仙)으로 불린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은 도통 남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 세태를 마이동풍으로 풍자해 읊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지은 시부를 들어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들으려 하지 않음이, 마치 봄바람이 말의 귀에 부는 것과 같다(世人聞此皆掉頭 有如東風射馬耳).”

마이동풍식으로 여론을 등지면 그 결과가 어떤지 12년 전에 이미 보지 않았던가. 박근혜정부는 이제 1년4개월여밖에 지나지 않았다. 독선과 아집은 던져버리고 귀를 더 크게 열어 민심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측근부터 개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국가 대개조는 고사하고 망가진 외양간도 못 고친다.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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