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꽃개회나무 향기 손에 닿을듯 기사의 사진
설악산 꽃개회나무. 인제=구성찬 기자
지난 19∼20일 이틀간 설악산에 머물렀다. 설악산 국립공원에서도 대승령∼귀때기청봉∼한계령3거리∼중청∼대청봉에 이르는 서북능선 길은 탐방객의 발길이 비교적 뜸한 편이다. 덕분에 눈잣나무, 만주송이풀, 노랑만병초 등 북방계 식물을 비롯한 희귀식물이 많이 깃들어 있다. 그렇지만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곳의 귀한 식물들이 해가 갈수록 개체수도 줄고, 상태도 점차 나빠짐을 느낀다고 말한다.

19일 오전 10시. 한계령 휴게소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가파른 탐방로 옆으로 노란 꽃을 피운 금마타리, 연분홍빛을 띤 흰 꽃떨기를 인사하듯 90도 숙인 숙은노루오줌 등 여름 야생화가 보였다. 군데군데 멈춰서며 초본의 이름을 대면서 올라가니 힘든 줄 모르고 한계령 삼거리에 도착했다.

조금 높은 곳에는 꽃개회나무가 한창이다. 물푸레나무 수수꽃다리 속의 정향·꽃개회·털개회·개회나무는 높은 산의 볕이 잘 드는 개활지나 계곡가에서 볼 수 있다. 꽃이 예쁘고 향기가 좋은 데다 줄기와 껍질이 위장병, 기침가래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예전부터 방향제와 약재로 우리 민족과 교분을 맺어 왔다. 유명한 ‘미스킴 라일락’은 한 미국인이 1940년대 말 북한산 백운대 근처에서 채집한 털개회나무 씨앗이 미국에서 품종 개량을 거쳐 원예종으로 상품화된 것이다.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한계령 삼거리부터 중청대피소까지 걷는 동안 꽃개회나무 향기가 좋았다. 등산로가 비교적 좁게 유지되고 있는 덕분에 걷는 동안 머리 위로도, 손만 뻗어도 바로 닿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분홍빛, 보랏빛 꽃송이에 코를 갖다댔다. 정향나무는 드물었지만, 해발 1400m 부근의 개활지에 흰 꽃을 아직 떨구지 않은 개체도 하나 있었다.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성종 16년인 1485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 일정과 감회를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라는 필사본에 남겼다. 그가 금강산 관광을 마친 후 강원도 양양까지 내려와 한계령을 넘을 때 그를 반겨준 것은 정향나무였다. “오색역을 출발해 소솔령(한계령)을 지나니 설악산의 봉우리가 무려 수십 개였다. … 정향나무 꽃을 꺾어 말안장에 꽂고 그 향기를 맡으며 갔다”고 그는 썼다.

500여 년 전, 해발 1004m인 한계령고개에는 남효온이 꽃을 꺾을 정도로 정향나무가 많았겠지만, 지금은 좀처럼 찾을 수 없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중청대피소까지 가는 길에도 정향나무는 해발 1300m 이상 지역에서만 드물게 발견된다. 정향나무는 소백산 주능선에서, 북한산에서도 사라져 가고 있다. 인위적 훼손보다 기후변화, 그리고 늘어난 등산객의 답압 탓일 게다.

서북능선과 마등령 등에 분포하는 분비나무의 위기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계령삼거리에서 서쪽 귀때기청봉으로 올라가 보면 탐방로의 분비나무 군락지에는 고사목이 즐비하다. 지름이 40㎝가 넘는 고목도, 10㎝ 이하의 어린 나무도 죽은 개체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 모두 기후지표의 극한치가 높아지는 기후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중청대피소를 2㎞가량 앞둔 지점부터 빗줄기가 강해졌다. 이 부근에는 건강한 모습의 분비나무가 많이 눈에 띄고, 고사목은 많지 않다. 어린 나무도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군데군데 잎이 붉게 변한 경우가 많았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4년 전부터 기후변화의 생태계 영향 조사 중 하나로 분비나무, 눈측백, 눈잣나무 등에 대한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있다. 동행한 국립공원관리공단 설악산사무소 정승준 팀장은 “이들은 뿌리내린 암반 토양층이 얇아서 수분과 영양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탓에 다른 고산지대 식물에 비해 활력도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중청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아침 대청봉으로 갔다. 범꼬리, 쌍오이풀, 고본, 털쥐손이, 생열귀, 등대시호 등이 보였다. 특히 이곳 외에는 백두산에서나 볼 만주송이풀이 곳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만주송이풀, 바람꽃, 난장이붓꽃, 장백제비꽃 등의 북방계 식물은 이곳이 남방한계선이다. 근처에 서식하는 노랑만병초와 홍월귤은 멸종위기종이다.

공단은 특히 희귀식물인 눈잣나무에 공을 들이고 있다. 키가 최대 4∼5m이고, 대개 1m 이하인 이곳 눈잣나무는 잣까마귀와 다람쥐가 열매를 따 먹어버리기 때문에 번식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 동물은 열매가 잘 익었을 때에는 씨앗을 퍼뜨리는 역할도 하지만, 채 영글기 전에 먹어버려 발아율을 떨어뜨리는 게 문제다. 공단 직원들은 26일 눈잣나무 종자 채취용 보호망 500여개를 대청봉 근처 곳곳에 걸쳐 일부 개체에 설치했다. 보존된 씨앗은 훼손지 복원장소에 파종된다.

야생화 애호가들은 설악산 서북능선을 ‘가슴이 설레는 곳’이라고 하지만, 설악녹색연합의 박그림씨는 “오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자연질서가 지배하는 생태계에서 어지간해서는 멸종이 일어나지 않는다. 멸종은 대부분 사람 탓이다. 정 팀장은 “정상만을 향해 앞만 보고 걸어가는 산행보다 동식물을 관찰하면서 천천히 걸으면 몸에 무리도 가지 않고, 즐거움도 배가된다”고 말했다. 느림의 산행 문화는 멸종위기 동식물을 보호하는 작은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