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진성] 日 고노담화 검증의 허구 기사의 사진
일본 정부가 30년 유예기간의 관례를 깨고 1993년 ‘고노 담화’ 발표 과정의 외교문서를 일방적으로 공개했다. 일본 정부는 한·일 외교에 치명적인 결례를 범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서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치화시킨 중대한 과오와 무지를 전 세계에 드러낸 것이다. 고노 담화는 한·일 정부 간 타협의 산물이라는 일본 정부 검증 발표 직후 한국 정부는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수차례 협의 요청에 따라 비공식적임을 전제로 의견 제시를 한 바 있으나 고노 담화는 전적으로 일본 책임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명확히 밝혔다.

고노 담화란 외교문서가 아니다. 일본 정부가 1992년 방위청을 비롯한 정부기관에서 발견된 127건의 자료에 기초해 군 위안부 제도의 사실을 밝힌 후 1993년 234건의 자료를 더 발굴하고 피해자 및 관계자 구술조사를 첨부해 보다 심도 있는 결과를 도출한 조사보고서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검증’은 새로운 자료 발굴에 따라 행해져야 하는 것이지 외교문서를 들추어내서 될 일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20년 전 일본 정부가 행한 조사를 외교적 타협의 산물로 전락시켜버렸다. 극우 역사학자 한 사람과 변호사, 국민기금 관계자 등 엄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판단을 하기 힘든 검증팀의 구성도 이번 검증의 정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예상했던 대로 검증의 핵심 내용은 위안부 강제동원과 그에 대한 일본군의 개입을 인정한 고노 담화 내용은 한국 정부와 문안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위안부 제도의 총체적 강제성은 물론이고 소위 ‘좁은 의미’의 강제 동원을 나타내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전쟁 직후에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등지에서 연합군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일본군이 위안소 설립과 위안부 동원을 직접 시행했다는 생생한 기록이 있다. 이들 지역의 피해자와 일본 군인들의 증언도 다수 채록되어 있다. 폭압적인 위안부 강제동원을 조사한 네덜란드 정부 보고서,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와 괌에서 위안부 강제동원에 관련된 일본 군인을 단죄한 연합군 재판 기록도 엄연히 존재한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이번 검증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와는 별 관계없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국민기금)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논리는 항상 이렇다. ‘위안부 강제동원은 없다. 여러 국제 협약으로 정부 차원의 모든 법적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인도적 견지에서 민간 모금으로 위로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원칙을 피해간 이 타협안에 대해 대만 정부는 일찌감치 국민기금이 지급할 액수의 돈을 피해자에게 전달하고 국민기금을 거부했다.

1993년에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생활안정지원법’을 설립하여 피해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던 한국 정부도 1998년 국무회의 의결로 국민기금에 상당하는 액수를 피해자에게 지급할 것을 결정했다. 이때 한국 정부는 ‘국민기금을 받지 않을 것’을 요청하는 여성가족부 장관 명의의 각서를 피해자에게서 받았다. 이례적으로 명확하고 강력한 입장 표명이었다. 유엔 인권위원회와 국제노동기구 등에서도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의 보상을 하라는 권고가 잇달아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기금이 가난한 피해자들 사이에 얼마나 큰 혼란과 분열을 조장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고노 담화 검증이 한국만을 겨냥하고 있는 것도 참으로 우매한 처사다. 고노 담화는 피해자가 한국 뿐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도 있다는 것을 명기하고 이들 나라에도 전달되었다.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에 수정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한국에 대해서 뿐 아니라 다른 피해국들, 나아가 세계 전체를 향해 말해야 한다. 일본 정부가 역사를 되돌리는 작업을 멈추고 역사 앞에 진실해지는 것은 한·일 간의 미래와 동북아 평화의 첫 계단이다.

정진성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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