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이훈삼] 사물의 이면을 볼 수 있어야 기사의 사진
지구촌 최대 축제로 불리는 브라질월드컵이 이제 우승자 가리기만 남아 정점에 이르고 있다. 가장 큰 축구 시장인 유럽 시간에 맞추느라 우리나라는 새벽 1시 이후에나 경기를 방송하는데도 시청자가 꽤 많은가보다. 기술과 체력, 단체 조직력의 예술을 보여주는 월드컵 결승전은 7억명 이상이 시청한다니 놀랍다.

그러나 축구의 나라 브라질은 이번 월드컵 개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심지어 경기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반대 시위는 그치지 않고 있다. 축구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월드컵 준비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고 부동산과 물가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속보다 겉이 중요하다고 해도

시위자들은 월드컵 개최에 들어간 약 12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교육, 건강, 주택과 교통난 해소에 투자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화려한 축제의 이면에는 자기 땅에서 쫓겨났거나 당장의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보다 나은 세상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으나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의 고단한 현실이 엄존하고 있다.

광복 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우리는 잘살아보자고 앞만 향해 줄기차게 달려왔다. 반세기 동안 지속된 산업화의 물결은 전쟁을 겪은 최빈국을 분단 상황에서도 경제대국으로 성장시켰다. 대규모 공장들과 첨단 시설, 고층 빌딩숲의 도시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우리의 가치가 되었다. 성장의 가치관으로 보면 산업화의 그늘에서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수많은 노동자, 대학생, 농민 등은 애써 드러내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였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은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대가 정말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이고, 그 소가 정말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런 명분도 한순간에 초라해진다. 거대한 성장의 광고판에 가려진 부끄러운 이면을 터부시하는 사회는 천박함을 극복할 수 없다.

더욱이 이면을 공공의 광장으로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는 사회가 겪어야 할 대가는 참혹하다. 그것이 세월호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지 않게 실행되는 탐욕의 구조와 불의하지만 달콤한 그 열매에 도취되어 공적 책임을 방기한 사람들의 악마적 결합이 상상을 넘는 참극의 한 원인임은 분명하다.

이번 사고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지 않는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명백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밝히고자 하는 것은 사고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해야만 정확한 대안을 마련할 수 있고 그것만이 이러한 참극의 재발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안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억울한 304명의 희생자들에 대해 살아남은 이들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눈으로 바라보자

이 점에서 정치권은 사고의 이면을 포함하여 한 점 의혹도 없이 진상을 규명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SNS를 통해 널리 떠도는 갖가지 의혹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만이 사후에라도 책임적 자세를 보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대하거나 복잡한 사건일수록 우리는 미궁(迷宮)에 빠지기 쉽다. 부분에 갇혀 전체를 통찰하기 어렵고 겉에 시선을 빼앗겨 이면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실체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높은 곳에서, 깊이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조감도가 필요한 이유다.

난마처럼 얽힌 사건일수록 드러나거나 보여주는 부분에만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그 이면을 놓치지 않으면서 종합적인 시야를 획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개인의 삶이나 역사의 계기나!

이훈삼 주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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