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김계동] 6·25 빨리 끝날 수 없었나 기사의 사진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마무리되어 60년 넘게 한반도는 휴전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6년간 계속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동아시아의 작은 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이 3년 이상 지속된 것은 수많은 의문과 반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구나 종전이 아닌 휴전에 의해 전투가 중단되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풀어야 할 많은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한국전쟁의 특성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내전으로 시작된 전쟁이 미국을 시작으로 서방국가들이 순차적으로 개입하면서 국제전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패배가 임박하자 중국이 개입하면서 양측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둘째, 전선이 한반도 끝에서 끝으로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전쟁이 시작된 중간지점으로 돌아가 휴전이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 전쟁은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고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우리는 전쟁을 분석할 때 대체로 전투의 전개과정에 관심을 갖지만, 전쟁의 이면에는 평화를 위한 노력 등 많은 일이 발생한다. 한국전쟁의 경우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영국과 인도 정부가 소련 및 중국 정부와 접촉하면서 평화중재를 시도하였다. 그 내용은 당시 중국이 유엔 의석을 대만 대신 차지하게 하고, 중국의 대만에 대한 권리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서방측이 약속하는 조건으로 중국과 소련이 북한에 압력을 행사하여 전쟁을 중지토록 하는 안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미국과 서방국가는 중국이 소련에 의존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 문제들에 대한 중국의 권리를 보호해 주기로 합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재안으로 제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국은 1950년 1월 대통령 성명으로 중국과 대만과의 관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고, 유엔 의석 교체를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미국이 이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 중재안을 거부하였다. 당시 북한군이 성공적으로 진격했기 때문에 미국은 열세의 입장에서 협상할 수 없다면서, ‘힘의 우위에서의 협상’ 원칙을 고수하며 거부하였다. 당시 소련과 중국은 이 중재안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음으로 영국이 한국전쟁의 확전을 막으려던 시도는 1950년 10월 중국의 참전 직전에 이루어졌다. 유엔군의 38선 이북 진격 시 중국은 계속 참전 경고를 하였는데, 미국은 이를 무시하였으나 영국 정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영국은 중국의 참전 우려가 있으니 북위 40도선 부근인 한반도의 잘록한 목 부근에서 진격을 일단 멈추고, 그 이북지역은 완충지대로 하는 협상을 하면 중국이 개입하지 않아 한국전을 조기 종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 안을 거부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총공세를 벌였다. 결국 중국은 유엔군이 압록강변 한 도시에 도달하자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결국 영국을 비롯한 일부 서방국가의 평화중재 및 협상안을 수용하지 않고 오로지 진격을 한 미국은 더 이상 전쟁을 승리로 끝내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1951년 7월부터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휴전협상은 포로송환 문제를 놓고 양측이 포로 전체를 송환하느냐 반공포로를 제외한 자발적 송환이냐를 놓고 2년이나 시간을 끌었다. 당시 유엔 측이 포로를 심사하여 반공포로들을 즉각 석방했다면 공산 측은 크게 반발했겠지만, 송환을 반대하는 포로들이 결국 송환되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전쟁을 더욱 빨리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을 더 빨리 끝낼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물론 평화중재 및 협상에 대한 분석은 가정법에 근거하고 있다. 실제로 평화협상이 이루어졌을 경우 과연 성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지만 이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은 점은 반성해야 한다.

김계동(연세대 교수·국가관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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