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속의 샘] 두억시니와 귀신 기사의 사진
텁텁하고 무더운 여름밤이 시작되었다. 이런 때 귀신 이야기도 재미있으리라. 인류는 온갖 사물과 현상에 이름을 붙이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왔다. 원인 모를 생소한 불치병에도 일단 이름을 붙이고 보면 가슴을 옥죄던 극도의 공포는 한결 덜어지는 법이다. 이름붙이기는 낯익게 하기의 다른 말이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대상은 비로소 인간의 인식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름붙이기는 미지의 비밀을 풀려고 노력하는 인류의 첫 번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모를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현대의 인류는 그것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가고 있지만 종전에는 그러한 것들을 대개 귀신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놓았다. 그러나 워낙 범위가 넓은 데다 구체성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붙여놓아도 정체를 시원히 알 수 없고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귀신은 이름이 있으면서도 이름이 없는 존재다.

유교적 사유 전통으로 보면 기적적인 현상과 귀신 따위 이야기를 멀리한 공자 이래 귀신은 경이원지(敬而遠之)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호기심이나 공공연한 담론거리가 되기 어려워야 마땅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귀신 이야기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한다. 공자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귀신은 늘 사람들의 관심 한복판에 있었다. 유교의 핵심 경전인 ‘중용’의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하고 있고, 수많은 지체 높은 선비들이 적잖이 귀신 이야기를 했다.

정통 주자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제자요 그 자신 역시 정통 주자학자였던 임방이 이야기해준 귀신 가운데 두억시니란 놈이 있다. 이야기는 이랬다.

어느 대갓집에서 경사스러운 잔치가 열리던 날, 안방 마루 발 밖에 험궂게 생긴 열대여섯 나이의 더벅머리 아이가 서 있었다. 그 아이가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집주인이 계집종을 시켜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아이는 말을 듣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장정 몇을 시켜 끌어내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다시 힘센 무인 대여섯 명을 앞세웠지만 사내아이는 여전히 눈 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그제야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 무릎 꿇고 싹싹 빌었고, 한참 뒤 아이는 빙긋이 비웃음을 흘리고는 홀연 사라졌다. 그날부터 그 집 잔치에 왔던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려 죽었고, 아이를 을렀던 장정과 무사는 머리가 으깨져 죽었다.

사람들의 머리를 눌러 으깨어 죽였기 때문에 이 귀신을 두억신(頭抑神)이라고 했다니, 두억시니의 한문식 음차다. 평생 마음공부에 매진하며 수양을 해온 학자이자 고위 관료가 두억시니 같은 이야기를 채록하여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남다른 호기심일까? 아니면 괴이한 이야기를 유달리 좋아하는 천성일까? 나는 그의 두억시니 이야기가 사람의 내면에 자칫 자리 잡기 쉬운 궂은 마음의 한 상징이라고 본다.

남의 경사를 흉하게 일그러뜨리고 남의 불행을 더욱 험궂게 만드는 것, 천하 사람들이 매달려 말려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것, 애꿎은 사람의 가슴에 대못을 박거나 심지어 수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것, 그러나 자취를 찾으려 들면 온데간데없는 것. 사람의 궂은 마음이 아니고 무어랴. 평생을 닦고 닦아도 부지불식간에 몸의 한복판으로 찾아들어와 하늘의 마음을 밀어내는 탐욕과 고집, 시기와 분노. 발 밖에 서 있던 사나운 얼굴의 더벅머리 사내아이는 다름 아닌 하늘의 마음 한 구석에 수시로 들락거리는 인간의 못된 마음이다.

대문호 박지원이 이야기하는 귀신은 어떤 것일까. 박지원은 젊은 날 재담으로 한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민옹이란 노인을 만난 일이 있다. 그날도 민옹은 밤새도록 해학과 감동을 뒤섞어 이야기판을 주도하며 좌중을 들었다 놓았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귀신을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민옹은 즉시 보았노라고 대답한 뒤 눈을 부릅뜨고 물끄러미 둘러보다가 등잔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켜 저것이 귀신이라고 하였다. 지목 당한 사람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러자 연암은 이렇게 대답했다. “밝은 데 있는 것은 사람이요, 어두운 데 있는 것은 귀신이요. 지금 어두운 데 앉아 밝은 곳을 보면서, 제 몸을 감추고 사람들을 엿보고 있으니, 귀신이 아니고 무엇이오.” 박지원의 귀신 역시 익명성에 몸을 숨길 때 슬며시 일어나는 못된 마음과 무관하지 않다.

과학이 일상이 된 현대, 밤낮의 구별도 없어진 이 불야성의 도시에 두억시니나 귀신이 발붙일 곳이 아직 남아 있을까? 남아 있다면 그곳은 가장 밝으면서도 가장 외진 곳,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밤을 밝히는 기술은 더할 나위 없이 발달했지만 마음을 밝히던 공부는 잊혀진 지 오래인 시대. 그렇기에 오늘날은 오히려 두억시니와 귀신이 횡행하기에 꼭 좋은 세상이다. 가슴이 욕망으로 파도치거나 까닭 없이 사나워질 때 우리 마음의 가장 외진 구석을 찾아 등을 켜 보자. 낯설면서도 무척이나 낯익은 두억시니 귀신을 만날 것이다.

이규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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