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기석] 뒤를 돌아보는 새 기사의 사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격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무고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눕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어울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사야의 꿈이 서린 땅에서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해함과 상함이 일상이 되고, 미움과 증오를 확대 재생산하는 이들이 권력을 잡는 세상이다. ‘나’의 안락한 삶을 위해 ‘너’를 경계선 밖으로 쫓아낼 때 평화도 함께 쫓겨난다. 평화는 나의 있음이 기쁨이듯이 네가 있어 다행이라는 마음을 통해 역사 속에 유입된다. 하지만 현실 세계를 장악한 이들은 평화를 미워하는 사람들이다.

격화되고 있는 이·팔 분쟁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소슬한 바람 소리만 들려오던 광야의 정적을 깼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셨고, 살 길과 더불어 미래의 희망까지 제시하셨다. 그 희망은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강인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땅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공포와 죽음의 심연으로 빠져들던 하갈이 만났던 생명의 샘 브엘라해로이는 어디에 있는가.

팔레스타인 작가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취한 새’라는 글에서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발견되는 도기에 새겨진 필리스트라는 신비한 새 문양이 갖는 상징성에 주목한다. 그 새는 목을 틀어 뒤를 바라보며 눈을 기다린다고 한다. 작가는 “나도 이 새처럼 뒤를,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 진실로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 600만 난민이 뒤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제 땅에 있던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잃어버린 천국을 그리워한다. 내게는 이 새가 그런 사람들의 상징으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앞을 바라볼 수 없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는 비극. 참 시리다. 하지만 이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도 간과할 수 없다.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 없이 떠돌며 그들이 겪었던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회 불안이 야기될 때마다 희생양으로 선택되기도 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을 묘사할 때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유럽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달아나려고 해도 받아주는 나라가 없었다. 그렇기에 팔레스타인 땅에 국가를 세웠을 때 그들은 감격했고, 그 땅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정착촌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세운 분리 장벽은 소통 거부에 대한 완전한 상징 아닌가. 검문소에서 날마다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의심받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깃든 모멸감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김찬호 교수는 모멸감을 일러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 말했다. 그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내닫게 마련이다.

모든 폭력은 신에 대한 도전

성경은 애굽의 전제정치 아래 신음하던 히브리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해 증언한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못 들은 체 하지 못하신다. 그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개입하셔서 약자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키고, 그들 속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불어넣으시는 것이 그분의 일이다. 분별력 있는 이들이라면 오늘 하나님이 누구를 향해 걷고 있는지 안다. 일단의 청년들이 불교인들의 성지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것은 믿음을 빙자한 폭력이다. 극단적인 자기 확신은 일쑤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바뀌게 마련이다. 타자의 삶을 함부로 부정하는 일체의 행동은 폭력이고, 모든 폭력은 신에 대한 도전이다.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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