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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토크] 할머니 가설

중년 여성의 폐경은 과학자들이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 중 하나다. 생명체는 번식을 생존 이유의 최우선에 둔다. 때문에 모든 동물은 죽을 때까지 새끼를 낳는다. 그런데 왜 여성은 생명이 다하기 훨씬 이전에 자손 생산을 포기할까. 인간과 유전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침팬지와 비교해보면 궁금증이 더 커진다. 수명이 거의 다하기 전까지 새끼를 낳는 암컷 침팬지의 경우 생식능력 저하와 다른 신체기관의 노화 현상이 비교적 일치한다. 하지만 중년 여성의 경우 다른 신체기관은 정상인 상태에서 생식 기능만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지구상에는 인간 말고도 두 종류의 동물이 일찍 폐경기를 겪는다. 범고래와 들쇠고래가 그 주인공이다. 30대에 출산을 끝마친 후에도 몇 십년을 더 사는 이 두 종류의 고래들은 특히 무리의 조직력과 사회성이 강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같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몇몇 연구자들은 ‘할머니 가설’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일찍 폐경기가 오는 이유를 육아 혹은 손주들의 양육에서 찾는 게 이 가설의 핵심이다.

성장하는 데 유난히 오랜 기간이 걸리는 인간의 경우 여성이 사망할 때까지 출산 능력을 지닌다면 늦게 낳은 아이는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을 수 없다. 범고래의 경우에도 어미와 함께 지내는 성년기 범고래들이 그렇지 않은 범고래보다 생존 확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인간과 범고래는 오랜 기간 동안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서 일찍 폐경을 한다는 것이다.

핀란드 연구팀이 루터파 교회가 보유하고 있던 18∼19세기의 200여년간 출생 및 사망, 결혼 기록을 조사한 연구결과를 보면 손주들을 위해 할머니들이 왜 일찍 생식을 포기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경우엔 그 아이들의 생존율이 50∼66% 떨어진 데 비해 엄마와 딸이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경우 생존율에 영향이 전혀 없었던 것. 모녀간에는 협력을 하지만 혈연적으로 관계가 없는 고부간에는 자신들의 아기를 위해 먹이 경쟁을 했다는 의미다.

할머니 가설은 먹이 경쟁이 필요 없는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보살펴줄 대상이 있는 할머니들이 독거노인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연세대 연구팀이 최근 발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손주를 양육하는 할머니가 그렇지 않은 할머니보다 자녀와의 관계는 물론 삶에 대한 만족도가 더욱 높은 것으로 나왔다.

이성규(과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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