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금대봉 갈매나무에는 백석의 혼이… 기사의 사진
금대봉 근처에서 만난 갈매나무. 태백=구성찬 기자
갈매나무를 만나러 지난 22일 금대봉에 갔다. 시인 백석이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고 읊은 그 나무 말이다. 갈매나무는 여름에는 짙푸르고 무성한 잎이, 겨울에는 가시처럼 삐죽삐죽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이 야성미를 자아낸다. 갈매나무과의 낙엽활엽관목 또는 소교목으로 다 크면 5m가량 된다.

출발점인 두문동재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서 태백시 화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 정상 남쪽으로는 함백산(1573m), 북쪽으로는 이번 탐방의 목적지인 금대봉(1418m)∼분주령∼대덕산(1307m)∼검룡소에 이르는 길이다. 능선을 주로 통과하는 이 숲길은 남한 최대의 고산 들꽃 군락지로 유명하다.

남들은 야생화만 눈에 들어오는 이 시기에 갈매나무의 짙푸른 잎과 상봉하기 위해 금대봉 오르는 길을 버리고 지름길을 택했다. 탐방로 옆에서 첫 갈매나무를 만났다. 키에 비해 굵은 줄기가 첫눈에 인상적이다. 거칠게 부풀어 일어난 외피가 역시 강인한 이미지를 조성하는 데 일조한다. 갈매나무의 작은 가지 끝은 가시로 변한다. 두툼한 편인 잎이 불투명한 녹색으로 가장자리에 둔한 잔 톱니를 지녔다. 언뜻 감나무 잎을 연상시키지만, 그보다 더 긴 타원형이다. 백석이 떠올린 갈매나무는 겨울의 눈 속에서 만나야 제격이긴 하지만 여름에도 짙푸른 잎이 좋다.

‘(…)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마지막 부분) 갈매나무는 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어요, 이미지다. 겨울에 하얀 눈을 맞고 선 갈매나무는 백석의 마음속에서 ‘굳고 정한’ 심상을 지녔다.

갈매나무는 중국, 극동러시아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함경도에서 강원도까지 주로 백두대간에 분포한다. 1940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만주에 살았던 백석에게 갈매나무는 친숙했을 것이다. 젊을 때 결벽이 있었고, 멋진 외모를 지닌 일본유학파 모던보이였던 백석은 문단의 기라성 같은 선후배가 친일로 돌아서고, 일본어로 작품을 쓸 때에도 결코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갈매나무를 동경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능선을 따라 더 걸으니 더 큰 갈매나무가 나타났다. 키가 5m에 육박하는 이 개체는 밑둥치 지름이 20㎝가량 되는 고목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웅크리고 앉아서 올려다보니 신비한 동화의 나라 안에 들어선 느낌이다.

갈매나무는 햇빛을 좋아하면서도 건조한 곳을 싫어해 습지나 계곡에서 잘 자란다. 환경단체 ‘우이령사람들’의 이병천 회장은 “갈매나무나 야광나무는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계곡의 물안개, 금대봉 부근 높은 능선지대에서는 운무 덕분에 잘 발아되고 번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금대봉 일대는 동해로부터 고온다습한 바람을 받아 운무가 잘 형성된다. 갈매나무는 또한 추위를 잘 견디지만, 공해에는 약하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갖춘 곳이 많지 않기에 갈매나무는 흔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산이든지 박정희 시절 산림녹화정책 덕분에 대개 조림지가 형성돼 있다. 그런데 속성수를 심더라도 어떤 나무를 심었느냐에 따라 산의 종 다양성이 좌우됐다. 일본잎갈나무 조림지의 경우 이 나무가 겨울철 잎을 다 떨어뜨리고 난 후 4월이 돼서야 새 잎이 나기 때문에 초봄 키 작은 초본들의 성장과 번식을 방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잎갈나무 조림지와 그 주변의 종 다양성은 높다. 반면 잣나무, 리기다소나무 조림지는 이들 침엽수가 햇볕을 독점함으로써 다른 풀과 나무의 생장을 방해한다. 금대봉과 대덕산 일대는 조림지 면적이 넓지 않은 데다 모두 일본잎갈나무다. 그 덕분에 노랑무늬붓꽃, 태백기린초, 터리풀, 금강제비꽃, 도라지모시대 등 한국특산식물 15종, 모데미풀, 가시오갈피 등 희귀식물 16종이 서식하고 있다.

대덕산 정상 부근에서 산돌배나무의 아종인 취앙네(취향리)를 만났다. 분류학자 중에도 산돌배나무와 돌배나무를 구분하지 않는 이들이 있지만, 취앙네는 열매의 햇볕을 많이 받는 부분이 사과 부사품종처럼 발갛게 익는다는 점에서 돌배나무나 산돌배나무와 뚜렷이 구분된다. 대덕산과 금대봉 일대에 산돌배나무의 개체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들 중에는 고목이 많다.

취앙네는 안성배의 원조이다. 안성배는 취앙네를 원종으로 삼아 개량된 것이다. 북방계 식물인 산돌배나무나 취앙네는 원산지인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만주 시절의 백석도 취앙네를 먹어본 적이 있었나 보다. ‘이왕이면 香향내 높은 취향리梨 돌배 움퍽움퍽 씹으며 머리채 츠렁츠렁 발굽을 차는 꾸냥과 가즈런히 쌍마차 雙馬車 몰아가고 싶었다.’(안동, 마지막 부분)

대덕산에서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로 내려왔다. 한국특산식물이 많고, 갈매나무가 많이 사는 고산지대에서 평안도 사투리를 고집했던 백석을 다시 기려본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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