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정철훈] 한민족의 대장정을 돌아보며 기사의 사진
지난 17∼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가 주관한 제10기 ‘독립정신 답사단’에 합류해 중국 동북지역 항일투쟁 현장을 다녀왔다. 하얼빈∼산시∼하이린∼투먼∼옌지∼룽징∼허룽∼백두산∼퉁화∼단둥∼다롄으로 이어지는 2500㎞의 여정을 6박7일 동안 소화했으니 비좁은 국도와 산비탈이 많은 지방도로를 따라 하루에 얼추 400㎞를 이동하는 대장정이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후 관직을 버리고 대동단 총재 자격으로 상하이로 망명한 동농 김가진(1846∼1922)의 손자인 김자동 회장은 여든여섯의 고령에도 지팡이에 의탁해 허리를 곧추세운 채 봉오동 청산리 일송정 등 항일 전적지를 둘러보며 사람은 기억을 통해서 여행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1928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줄곧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이동경로를 동행했던 김 회장의 옆 좌석에 앉아 일주일 내내 임정 시절의 회고담을 들을 수 있었던 건 흔치 않은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행운이었다. 지난해 말 자서전인 ‘상하이일기’를 출간한 그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는데 특히 1940년 임정 충칭(重慶) 시절의 심층적 관찰은 소년적 시선을 넘어선 비평적 논픽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김자동의 조부 김가진의 묘소는 상하이 송경령 능원에, 한국전쟁 때 납북된 부친 김의한의 묘소는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그리고 모친 정정화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김의한·정정화 부부는 1922년 일가족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한 김구를 위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의 거주지인 연경방 10호를 흔쾌히 내주었고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1924년 조계지 밖의 폐병원에서 숨을 거둘 때 임종을 지킨 것도 이 부부였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거사 이후 상하이를 탈출한 100여명의 임정 요인들과 그 식솔들을 항저우∼난징∼광저우∼치장을 거쳐 충칭에 도착할 때까지 먹여 살린 이는 임정의 안살림을 맡은 정정화였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임시정부 기념관 하나 세우지 못한 것은 역대 정부가 짊어진 큰 부채가 아닐 수 없다. 남북한은 해방 직후 각각 앞다퉈 단독정부를 수립했다지만 대한독립의 완성은 민족통일에 있을 진대, 대장정의 길목에서 보면 남북한 정부는 어딘지 임시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상념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피난민수용소가 있었다는 퉁화를 지날 때나 신의주가 바라다 보이는 단둥의 압록강 단교를 밟으면서 더욱 심화됐는데 과거의 크기가 현재의 크기보다 월등히 커서 부재와 현존이 서로 교대하면서 자리를 바꾸는 시대착오적인 풍경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번 답사단의 대장정은 개인적으로도 뜻깊었다. 정년퇴임을 맞아 25성상을 함께해 온 국민일보를 떠나면서 나는 또 다른 대장정의 길목에 서 있음을 중국 동북지역의 황토를 밟으며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돌이키자면 모든 삶은 유동적이고 언젠가 끝이 있으며 임시변통이다. 그 25성상 가운데 절반 이상을 문학과 학술 등 인문학 분야를 담당했고 지금은 고인이 된 서정주 박경리 이문구 이청준 최명희 제씨를 비롯해 고은 신경림 김주영 황석영 여러 문학적 대가들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으니 무엇인가가 사라졌다가 다시 회귀하는 이 지상의 놀이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지복이 아닐 수 없다.

보르헤스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약간 표류하면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내가 타고 온 선박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그 선박이 남겨놓은 거품과 물결이 여전히 일렁이는 그런 상실의 표류 말이다. 그러므로 ‘상실을 통과해야 진정한 심연에 닿는다’는 말과 ‘사람은 기억을 통해 여행한다’는 말을 한동안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