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이훈삼] 게으를 권리와 일할 권리 기사의 사진
찰리 채플린의 명화 ‘모던 타임스’(1936년)는 노동의 단순 반복성이라는 산업사회의 결정적 모순을 풍자하고 있다. 효율성이 지고선인 사회에서 인간은 창의적·통전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한다. 하루 종일 컨베이어벨트에 따라 나사만 돌리는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 머릿속에는 개미는 성실하고 근면한 반면 베짱이는 게으르고 나태한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땀 흘려 일하는 삶은 성공으로 귀결되지만 게으름은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부자는 자기 노력의 결실이며 빈자는 게으름의 결과라는 도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한국인들만큼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을까?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24시간 영업점이 확대되고 있다. 초기 자본주의의 발달과 근면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깊숙이 연관되어 있듯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바울의 음성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잘살아 보자는 한국사회에 적중하는 경구가 되었다.

반갑지 않은 노동

고대사회에서도 노동은 인간을 괴롭게 했나보다. 성경은 노동을 원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보았다. 노동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의 실존적 고백이 노동이야말로 천형(天刑)이라는 한탄으로 표현되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인간이 놀기만 한다면 그것 또한 천국이 아니리라.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노동은 어떤 것일까?

2012년 한국 노동자들은 OECD 국가 평균보다 400시간이나 많은 2163시간을 일했다. 반면 노동생산성은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침부터 교통지옥에 시달리면서 출근해 밤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육체에는 피로가 누더기처럼 쌓인다. 몸이 힘들면 만사가 귀찮다. 휴일이면 누워 TV를 보는 것이 고작이다.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은 고상한 구호에 불과하며, 일하는 것이 반가울 수 없다. 이 반갑지 않은, 낯선 노동이 노동의 소외(疏外)다. 노동은 원래 인간에게 노력한 대가와 성취감을 안겨주는 반가운 것이지만 너무 버거운 노동은 지겨운 것이 사실이다.

여름 2∼3주 동안 온 국민이 바다와 계곡으로 쏟아져 나간다. 뙤약볕 아래에서 오고가는 길이 주차장으로 변하기 일쑤지만 이렇게라도 낯선 노동의 찌꺼기들을 발산하지 않으면 일상을 지탱할 수가 없다. 이런 여름휴가는 한 달 이상 동안 가족끼리 캠핑 가서 자전거 타고 독서하는 여유로운 선진국의 휴가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정말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인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되짚어야 할 때가 되었다. 여러 해 전 어느 20대의 고백이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최소한의 생계비만 버는 대신 시간을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직조하는 삶을 택하고 싶단다. 물론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자제하며, 공공시설과 무료 쿠폰 등을 알뜰하게 이용하는 노력은 전제조건이다.

일터에서 쫓겨난 200여만명

우리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읊조리는 저편에서는 지금도 ‘너무 일하고 싶다!’는 눈물 섞인 탄식이 공존한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벌써 6년째 노동 현장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 사이 25명이 목숨을 잃었고, 회사가 청구한 손해배상 가압류가 47억원이나 된다. 노동에 목마른 이들이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유성기업,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사연도 있다. 이것이 소수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한 해 정리해고되어 노동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되고 생존을 위협받는 이들이 200만명을 넘는다는 사실이다.

노동이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라 반가운 일상이 되기 위해 우리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 한다. 동시에 낯선 노동조차 간절히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다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돌려주자고 다시 한번 되새기는 것이다.

이훈삼 주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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