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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재만 (2) “뜻대로 하소서” 집착 버리니 사시 7전8기 합격

“법으로 민초들 돕자” 사시 준비 시작 독학에 계속 낙방… 40 코앞에 기적이

[역경의 열매] 이재만 (2) “뜻대로 하소서” 집착 버리니 사시 7전8기 합격 기사의 사진
연세대를 졸업한 후 행정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의 이재만 변호사. 신앙 없이 1970년대 청년문화를 마음껏 즐기며 보낸 시기였다.
1970년대는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강의실보다 독수리다방에서 비틀스 음악 듣기를 좋아했고, 백양로에서 윤동주의 서시 읊조리기를 좋아했다.

대학 졸업 후 행정대학원을 다시 졸업했다. 그 후 동부전선에서 3년 만기 전역을 하자 31세가 되어 있었다. 남보다 2년 더 재수했고 대학원 2년에 군대 3년을 더하니 보통 사회생활을 27∼28세에 시작하는데 한참 늦어버린 것이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어느 비 오는 날, 도서실에서 창밖을 보니 어느 사람은 우산을 쓰고 가고, 어떤 이는 우산도 없이 비를 피해 뛰어가고, 어떤 사람은 여분의 우산을 손에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 법치국가에서 법은 인간에게 우산과 같은 존재다. 법을 모르면 그냥 비를 맞는 것이다. 아는 법이 힘이 되는 세상이다. 사법시험을 시작하자.” 나의 사법시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그 당시는 나의 30대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치학, 행정학을 전공하다 법학을 독학으로 하니 너무나 어려웠다. 주변에서 ‘바윗돌’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한번 고시원 자리에 앉으면 식사시간 외엔 꼼짝하지 않았다. 마치 묵언수행하는 수도자같이 하루에 단 한마디 하지 않고 보내는 날도 많았다.

바윗돌처럼 열심히 공부하니 불과 2년 반 만에 고시에 합격할 뻔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에도 아슬아슬한 점수 차이로 계속 낙방했다. 차라리 큰 점수차로 낙방하면 방향 전환을 생각해 볼 수 있을 텐데 근소한 점수차로 낙방하니 내 노력이 부족한 점에 대해 자책하며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버텼다. 자꾸 떨어지기만 하니 답답한 마음에 후배들과 지리산 종주를 떠났다.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서 일출을 보러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솟구치며 신에게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는 크리스천이 아니어서 천지신명께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신이여, 합격시켜 주소서!”

일출을 보러 천왕봉에 모여 있던 사람들 보기가 창피해서인지 옆에 있던 후배들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나를 말렸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한 보람도 없이 낙방이 계속되자 누군가가 방해를 하는 것 같았다. 신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시험에 붙을 것 같아서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제목이 다시 바뀌었다.

“신이여, 방해하지 마소서!”

1차 시험을 보름 앞둔 어느 날, 남동생이 나를 고시원까지 데려다 주었다. 동생이 차를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것이 동생과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렸다. 동생은 내가 시험 보기 사흘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연락을 받고 영안실로 달려갔는데 너무나 원통하고 슬퍼서 식음을 전폐하고 3일간 울며 소주만 마셨다. 당시 남동생은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형인 내가 결혼을 하지 못하니 결혼을 하겠다는 말도 못하고 있다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죄책감이 더해져 가슴이 찢어졌다.

고시 시험일이 동생의 발인일이었다. 심신이 탈진상태라 시험 볼 엄두도 못 내는 나를 가족들은 시험 전날 집으로 보내어 쉬게 한 뒤 시험을 보게 했다. 시험장에서는 시험을 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시험지를 공허한 눈으로 보고 하기를 여러 번 했다. 며칠간 잠을 못 잔 탈진상태에서 시험을 봤는데 1차가 붙었다. 참 이상했다. 도저히 붙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이듬해 2차 시험을 볼 때는 남동생을 잃고 난 뒤라 시험 합격에 대한 애착도 집념도 다 스러졌다. “신이여, 필요하면 합격시켜 주시고 필요치 않으면 낙방케 하소서.” 기도제목이 다시 바뀌었다. 집착을 버린 그 해, 고시에 최종 합격했다. 나는 드디어 7전8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이 코앞이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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