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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전정희] ‘명량’, 고독한 예수

[삶의 향기-전정희] ‘명량’, 고독한 예수 기사의 사진
신으로 덧입혀진 이순신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은 신으로 덧입혀진다. 그는 명장이긴 했으나 베드로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예수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인간으로 덧입혀진다. 구세주임에도 사람들은 제각각 원하는 바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담아 인간의 얼굴로 그려낸다.

인간은 신이 되고, 하나님은 인간이 되는 ‘타의로부터의 탈속’. 그로 인해 시대의 영웅과 만민의 구세주는 각기 ‘신화’와 ‘신’으로 추켜세워지거나 밀려난다. 영웅도 구세주도 원하는 바가 아닌데도 말이다.

명량은 박정희 시대의 영화 ‘성웅 이순신’의 부활이다. 성웅 이순신이 관제 영화 성격이 짙었던 반면 명량은 관객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붐이라는 것이 다르다. 명량은 개봉 10일 만에 800만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명량의 인기는 ‘리더십’이란 키워드로 정리된다. 리더십 부재로 위기감을 느낀 국민이 뉴미디어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순신 신화’를 써내려 간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겪은 백성은 권력이 요구하는 사상이나 이념에 충실하기보다 구전되는 도참설 ‘정감록’에 혹했듯 자신과 나라를 구해줄 초월적 절대자를 이순신을 통해 찾는 것이다. ‘세월호 침몰 참사’ 등 연이은 불안 요소가 사회 현실을 부정하는 강한 인식이 되어 영화로 발화되는 듯싶다.

명량에서 이순신은 무오류의 신성이다. 이순신이 아들에게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한다. 그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이런 고뇌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의 기도처럼 절박하다.

그런데 이 ‘백성’에 대한 방점은 원전이 갖는 백성에서 곡해된 영화 텍스트적 언어다. 즉 예술성보다 진영 논리가 더 배어 있는 한국 영화계 흐름을 반영하는 언어다. 백성을 내세워 이기려는 싸움, 즉 자신들만의 이즘(ism) 수호를 위한 이순신이다.

‘난중일기’에서 보듯 이순신은 불편한 것에 격정을 쏟아내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보직과 주도권을 놓고 원균과 다투었던 칠정을 가진 인간이었다. 한데 영화는 제작진에 의해 전인적 인간형으로 의도되고 해석됨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적인 영웅은 사라지고 신격화를 넘어 신화로 치닫는다.

명량의 승자들은 말한다.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한 것을 알기나 할랑가.” ‘네티즌 추천 명대사’가 아니다. 불편한 계몽이며 주입일 뿐이다.

인간으로 덧입혀진 예수

예수는 이 같은 상황을 베드로에게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멋진 대답은 뜻하지 않게 “사탄아 물러가라!”는 호통으로 돌아온다. 예수가 대속의 죽음을 알리는데도 베드로는 이즘에 매몰되어 그가 유대의 왕이 될 것으로 믿었다.

요즘 한국교회는 이렇게 베드로처럼 ‘자신의 성전’ 안에 인간의 얼굴을 한 예수를 모시기 바쁘다. 다툼이 있는 교회가 매체 광고를 통해 서로를 비방하는 민낯을 드러내고 서로 예수가 자기편이라고 말한다.

이순신은 무력하고, 예수는 고독하다. 이순신의 죽음도 예수의 죽음도 저들 손에 평범하고 무의미하게 변질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자유를 얻은 이순신과 예수를 우리는 너무나 모른다.

전정희 종교국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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