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준동] 통일, 작은 발걸음부터 시작하자 기사의 사진
그 유명한 독일 동방정책의 핵심은 ‘접근을 통한 변화’와 ‘작은 발걸음 정책’이었다. 서로 만나 대화하고 실현 가능한 작은 일부터 실천해 나가자는 것이다. 서독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69년부터 추진한 이 정책에 따라 서독은 수십년 동안 동독의 반발을 줄여나가는 현실적인 정책노선을 견지했고, 대화의 끈도 놓지 않았다. 합의문도 언제나 실질적이고 실용적이었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작지만 의미 있는 일부터 실천에 옮겼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이런 두드림이 거듭되고 쌓이면서 베를린장벽은 일거에 무너졌다.

독일 통일의 기폭제 역할을 한 이 동방정책을 설계한 이는 에곤 바 전 서독 특임부 장관이었다. 브란트의 비서실장이기도 했던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북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기억하고 많은 일을 기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흔두 살인 노(老)정객의 충고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대 정부의 통일 정책을 보면 하나같이 메시지만 거창했지 디테일에 약했다. 차근차근 풀어가기보다 정략적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남북은 서로를 기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별로 없다. 박근혜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사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주창했고, 취임 후 처음 맞은 6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통일 한국을 만드는 것이 100% 대한민국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통일대박론’을 설파했고, 3월에는 독일을 방문하면서 드레스덴 선언을 공표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통일 정책에는 구체적 과정이 다소 결여돼 있다. 남북한 간의 신뢰도, 통일에 대한 프로세스도 없이 단순히 통일은 대박이니까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어찌 보면 신기루를 좇는 식이다.

지난 11일 제안한 2차 남북 고위급 접촉도 그렇다. 추석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비롯해 쌍방의 관심 사항을 논의하길 희망한다고 했지만 한쪽에서는 북쪽이 바라는 5·24조치 완화·해제나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은 전제조건이 필요해 곤란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내놓은 한반도 평화정착 방안도 마찬가지다. ‘여건이 성숙되는 경우’ 평화체제 구축 문제를 논의할 수 있고, ‘관계 진전에 따라’ 각종 경제협력 사업을 위한 상업투자 허용 등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이 모두가 북한이 호응해야 가능한 일이다. 상대방이 흡수통일론이라며 중·단거리 발사체를 줄기차게 쏴 대고 대북 정책 전환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여건을 성숙시키고 어떻게 관계를 진전시키겠다는 디테일이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통일대박론’ ‘드레스덴 선언’ 같은 청사진이 먹혀들 리 만무하다.

지금은 큰 발걸음보다 동방정책처럼 실천적인 작은 발걸음이 필요한 때다. 당장은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교류·협력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래야 공통분모가 커지고 신뢰가 쌓인다. 정치적 수사를 넘어선 실용적인 프로그램과 이를 실행할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이은 박 대통령의 이후 행보가 중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4일 “한반도 평화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왔다”며 평화와 화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우리 정부도 광복절 경축사 등을 통해 북한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 상대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들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진정성을 보이면 북한도 닫힌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이 함께 노력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먼저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접근을 통한 변화’와 ‘작은 발걸음 정책’이 독일 통일로 이어졌듯 상호 배려하고 공감하는 ‘한국식 작은 발걸음’이 한반도에서 활짝 피었으면 한다. 이제 남과 북도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나갈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