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지금은 우리 모두가 용서할 때 기사의 사진
지난 며칠간 대한민국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취했다. 가톨릭 교인이든 아니든 많은 국민이 교황에 환호하고 그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미소 한 번에 감동했다. 16일 광화문 앞에서 열린 시복식에는 100만 인파가 몰렸다고 전해졌다. 2002년 월드컵 응원군중의 갑절에 이르렀다고 보도한 신문도 있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걸은 길을 따르겠다고, 그 이름으로 교황에 오른 분이다. 착좌 후 1년5개월이 지났을 뿐이지만 교황은 이미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로 ‘평화와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메신저’로 세계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교황의 모습이 보일 리 없는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도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그날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 보이는 표정들이었다.

슈퍼스타 프란치스코

가톨릭 교인들이 그러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모여들었고 함께 감동을 나눴다. 단지 교황이라는 지위 때문이었을까. 종교적 위상과 상징성에 압도되었던 것일까. 슈퍼스타에 대한 열광이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평화를, 희생을 그분에게서 보고자해서였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 국민이 지친 몸과 마음을 기댈 사람에 목말라해 온 것은 아닐까. 그 사람 앞에서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너무 외롭다고 칭얼거리기도 하고, 너무 슬프다고 기대어 울기도 할 그런 대상을 갖지 못해 마음들이 늘 아팠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 교황의 그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에 취하고 만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함께 존경할 인물, 함께 기댈 언덕이 없다. 고자질을 들어줄 사람, 싸움을 말려줄 사람의 자리는 텅 비어 있다. 마음의 양식이 될 교훈을 주는 이, 힘겹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품을 내어줄 이인들 있으랴. 그래서 먹으면서도 허기가 지고 껴입으면서도 한기에 떤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자리를 없애버렸을 수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편 만들기 게임에 끌려들어 경쟁적으로 인재를 고갈시켜온 것 같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유감스럽게도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없다. 남 앞에 설 만한 사람들은 이념 지역 세대 정파 등으로 분열돼 있다. 누구인가의 이름이 부각되면 그 순간에 헐뜯기가 시작된다. 그 때문에 원망하고 비난하고 조롱할 사람만 널려 있을 뿐이다.

교황은 방한 마지막 날이었던 18일의 미사에서 평화와 화해를 강조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성경말씀을 전하고 교황은 떠났다. 평화와 화해의 조건은 용서다. 원망과 증오로 메마른 사막에서 용서라는 단비가 없으면 평화와 화해의 싹이 돋아나 자랄 수가 없다.

평화와 화해의 조건은

우리가 존경할 만한 사람, 우리가 의지할 사람은 먼 다른 세상에서 만들어져 우리 앞에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 혹은 그들은 우리 속에서 우리가 찾아내기를 기다리고 있다. 교황은 그 길을 가르쳐 줬다. 그게 바로 ‘용서’다. 그걸 통한 ‘화해’다. 그 위에 평화의 꽃은 피어날 수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증오의 교의(?)를 집요하게 가르쳐 온 것은 정치권이다. 개개의 정치인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적인 정치 분위기가 증오라는 전염병을 퍼뜨렸다. 이념·지역·세대·정파 대립에서 힘을 얻은 증오는 이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되고 말았다. 결자해지! 정치인들은 마땅히 화해에 앞서고 이를 위한 용서를 솔선수범할 일이다. 그게 바로 우리 자신을 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이진곤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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