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기석] 너를 향해 내민 손 기사의 사진
잠포록한 날이 계속되면서 선선한 가을바람을 그리는 마음이 깊어진다. 꽤 여러 날 일상의 일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일을 하다가도, 사람을 만나다가도 마음은 자꾸만 광화문으로 달려간다. 시복식이 열렸던 광장, 수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쓰레기 하나 나오지 않았던 그 감동의 광장에 지금은 말 없는 흐느낌과 억눌린 부르짖음, 그리고 날선 분노가 넘실거린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서 있었다. 아니, 이건 과거형으로 말하면 안 된다.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밝혀 달라며 40일 넘게 단식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존재는 커다란 함성이 되어 사람들을 광장으로 부르고 있다. 그곳에 가도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저 낯익은 이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함께 앉아 있다 돌아올 뿐이다. 하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이 작은 일은 아니다.

거룩함은 만남 속에서 발생해

미국의 소설가인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아내의 손님을 맞이해야 했던 한 남편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내의 손님 로버트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매우 곤혹스러워한다.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잠시 허튼소리를 주고받다가도 이내 할 말이 없어진다. 담배를 나눠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것도 시들해질 무렵, 무료함과 민망함을 달래 보려고 텔레비전 채널을 서핑한다.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다. 한 채널에서 세계 각지의 대성당을 소개하고 있었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 ‘나’는 로버트에게 묻는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로버트는 수많은 사람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든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부탁으로 ‘나’는 대성당의 형태에 대해 설명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다. 로버트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종이와 펜을 가져와 함께 대성당을 그려 보자고 말한다. 그는 펜을 쥐고 그림을 그려 나가는 ‘나’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은 채 대성당 그림을 느꼈다. 벽체, 첨탑, 아치 모양의 창문, 버팀도리, 큰 문. 그림을 그려 나가는 동안 둘은 어떤 충만함을 맛본다. 이 작품은 ‘본다’는 사실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 나가는 동안 나는 엉뚱하게도 ‘나’의 손 위에 ‘너’의 손이 포개지지 않고는 대성당을 그릴 수 없다는, 거룩함은 두 존재의 만남 속에서 발생한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우연의 일치일까.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작품 ‘대성당’은 마주보고 있는,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 두 개의 오른손이 빚어낸 공간을 보여준다. 손처럼 표정이 풍부한 게 또 있을까. 노동하는 손, 기도하는 손, 어루만지는 손, 마주잡아 친근함을 드러내는 손, 손사래를 치는 손. 로댕은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 다가서는 손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임을 간파했던 것일까. 누군가를 향해 내민 손은 릴케의 말대로 더 이상 자신의 출신지인 육체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인 몸짓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국가가 구해줄 것이라고 믿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이가 고작 7.7%에 지나지 않았다는 보도는 우리 사회가 총체적인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치가들이나 종교인은 이것을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근본을 다시 세워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김영오씨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는 광경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 손을 그러쥔 채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하는 현장에서 진정한 교회가 탄생하고 있었다.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는 교황의 말은 성경의 핵심 메시지이다.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순간 정치도 종교도 여름 화로, 가을 부채의 신세가 되게 마련이다.

김기석 청파감리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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