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 칼럼] 덩샤오핑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유 기사의 사진
1976년은 중국 현대사에서 참으로 숨 가빴던 한 해였다. 그 해 1월 8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세상을 떠난다. 애도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당시 문화대혁명(문혁) 주도 세력이었던 4인방은 이를 가로막고 나선다. 이런 상황에서도 4월 5일에는 4인방에 반대하고 문혁을 부정한 소위 ‘4·5운동’(4·5 천안문사건)이 벌어진다.

이틀 뒤인 7일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당적만 남겨둔 채 당·정·군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다. 4·5운동의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덩샤오핑으로선 소위 삼락삼기(三落三起·세 번 낙마하고 세 번 일어남)의 마지막 낙마였다.

7월 6일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주더(朱德)가 사망했다. 같은 달 28일에는 탕산(唐山)대지진으로 무려 24만명이 사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9월 9일, 마침내 마오쩌둥(毛澤東)도 영면했다. 대륙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문혁도 그 뒤 4인방 체포와 함께 종언을 고한다. 10년 동안 역사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고 있었지만 마오 앞에서 아무도 제동을 걸지 못한 건 중국 정치체제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지난 22일은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 되는 날이었다. 덩은 마오 사망 다음해 7월 또 다시 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숙청되기 전 맡았던 당 중앙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 부주석 직위를 회복했다. 당 제10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0기 3중전회)를 통해서였다.

국영 CCTV가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역사전환기의 덩샤오핑’은 앞부분에서 마오 사망 이후 덩이 등장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당시 화궈펑(華國鋒)과 함께 혼란기를 주도한 예젠잉(葉劍英)은 덩을 만나 “당신의 출산(出山·칩거 상태를 벗어나 현실 정치에 나선다는 의미)은 전 인민의 요구”라고 말한다. 덩은 “당 중앙의 결정에 따르겠다”면서도 과학과 교육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어느 자리에 앉느냐보다 국가 백년대계를 먼저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그의 진정성은 ‘사조영웅전’ ‘소오강호’ 등을 쓴 저명한 홍콩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중국명 진융)과의 첫 만남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용은 기자 출신으로 명보(明報)를 만들고 사장 겸 편집인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했다. 저장(浙江)성에서 지주였던 아버지는 공산당의 토지개혁 과정에서 처형된 아픈 가족사를 갖고 있다.

그는 문혁 기간 중 4인방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명보에 지속적으로 썼다. 대신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중국을 이끌어갈 역사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76년 덩이 숙청됐을 때는 그가 곧 무대의 중심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덩샤오핑은 국가주석을 맡아야 한다’는 글을 명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덩은 이런 그를 1981년 7월 베이징 인민대회당 푸젠(福建)청에서 만났다. 덩이 만난 홍콩인으로는 진융이 처음이었다. 두 사람 간 만남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뉴스였다. 덩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국가주석을 맡아야 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국가주석? 자격이 없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국가주석이 되면 수명이 단축될지도 모른다. 중국과 국교를 맺은 120여개국 정상들과 만나는 일만 해도 상당한 에너지를 뺏긴다. 몇 년 더 살아서 국가와 인민을 위한 일을 좀 더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덩은 그 뒤 중앙군사위 주석직만 가진 채 중국의 미래 100년 청사진을 제시했다.

우리에게는 후손들을 위한 국가 설계를 놓고 진정 고뇌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있을까. 목전의 정략적 득실에 눈 먼 나머지 그런 일에는 정신을 쏟을 겨를조차 없는 건 아닐까. 물론 우리와 중국은 정치 체제가 달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치꾼이 설치는 풍토에서는 또 다시 후손들에게 못난 선조라는 소리를 듣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낀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정원교 논설위원 wkch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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