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김계동] 북한의 생존방식 기사의 사진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북한은 세계에서 안보 위협을 가장 많이 받는 국가에 속한다. 북쪽으로는 열강인 중국 및 러시아와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미군이 주둔하는 적대국가 한국이 자리 잡고 있으며, 동해로 진출하면 일본이 버티고 있다. 이런 위태로운 지정학적 위치에 놓인 북한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이했으며, 그때마다 생존을 위해 온건과 강경의 이중 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며 버텨오고 있다.

북한이 직면한 최대 위기는 1989년 탈냉전과 함께 시작된 국제질서 변화였다. 냉전이 끝나면서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가 확산됐고, 이와 더불어 북한도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또한 북한은 KAL기 폭파로 테러지원국에 지정되면서 국제제재를 받게 됐다. 더구나 90년부터 북한경제가 마이너스 성장함에 따라 경제난도 시작됐다.

체제위기에 처한 북한은 90년부터 유연한 외교와 대외 개방정책을 모색했다. 미국 및 일본과 관계개선 회담을 시작했고, 남한과는 고위급 회담을 개최해 91년 남북 간 화해·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또한 나진·선봉을 자유무역지대로 선정해 경제개방을 추진했다. 91년 김일성 신년사에서 북한은 남한에 흡수통일될 것을 우려하면서 남북한 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먹히지 않는 방식의 통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연한 외교가 체제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북한은 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핵을 활용한 벼랑 끝 외교로 전환했다. 이러한 북한의 벼랑 끝 외교는 북한에 성공적인 결과를 안겨줬다.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격하시켰던 미국과 고위급회담을 성사시키며 관계개선까지 가는 길을 만들었다.

북한이 다음으로 처한 위기는 94년 김일성의 사망이었다. 이번에는 체제생존뿐만 아니라 후계자 김정일 권력의 안정도 요구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김정일은 핵문제를 94년 10월 일단락시키고, 새로운 대외정책 추진은 보류한 채 정권의 안정만을 도모했다. 6년 동안 권력안정을 이룩한 김정일은 2000년부터 다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체제생존에 더해 체제발전까지 고려하는 듯이 보였다. 남한과의 정상회담, 서방국가들과의 수교, 신의주 개방을 추진했다. 국내적으로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개선조치를 시행해 시장개혁을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이 조치는 계획의 분권화, 시장가격 현실화, 기업 경쟁자율권 확대, 독립 재산권 강화, 화폐임금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대외 개방정책과 더불어 내부 경제개혁까지 추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유연한 대외정책을 모색하던 북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강경으로 선회해 제2차 핵위기를 조성하며 벼랑 끝 외교를 시작했다. 이후 현재까지 10년 넘게 북한은 핵카드를 활용한 강경외교를 지속하고 있다. 더구나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으로 권력이양이 이뤄지면서 북한은 뚜렷하게 새로운 대외정책을 추진하지 않고 있다.

90년과 2000년의 사례로 볼 때 북한은 체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강경으로 선회하곤 했는데, 그 이유는 개방정책이 성공할지의 여부, 그리고 개방에 따른 주민들의 의식변화 등 정치적 부작용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이 개방을 지속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안은 북한이 이 정책을 시도했을 때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주변에서 지원과 협력을 하는 것이다. 북한이 자신감을 가져야 개방을 통한 체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의 대북정책이 북한을 흡수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면 북한의 개방·개혁 정책에 협력을 해 점진적인 체제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핵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김계동(연세대 교수·국가관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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