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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전정희] ‘내 아버지’의 역사

[삶의 향기-전정희] ‘내 아버지’의 역사 기사의 사진
영화 ‘명량’ 등장인물 중 하나인 배설의 후손들이 제작사 측에 발끈하고 나섰다. 자신들의 선대인 역사 인물 배설(1551∼1599·조선 중기 무신)에 대해 영화가 최악의 비겁자로 묘사했다는 이유다. 영화에서 배설은 이순신 장군 암살을 시도하고, 거북선에 방화하고 도주하다가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허구다. 그러나 역사의 인물을 끌어들일 때는 시세에 대한 통찰이 앞서야 하는데 제작사의 의욕이 너무 앞섰던 것 같다. 어찌됐든 ‘배설은 이순신이 수군통제사가 된 뒤 한때 그의 지휘를 받았으나 1597년 신병을 치료하겠다고 허가를 받은 뒤 도망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고 정리됐다. 무공이 인정되어 책록된 건 훗날이다.

한국교회 통사적 기록 없어

지난 주일. 경북 청도역에 내리니 새마을단체가 역 앞에서 벌초객 맞이 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청도 화양읍교회를 방문하는 길이었다. 이날 한가위를 앞두고 부모와 선조를 모시려는 이들로 역 앞은 붐볐다. 그 벌초의 공간 무덤엔 잡풀이 나고 질 것이며 수대가 지나면 그 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전 1:4) 있을 뿐이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전 1:9) 선대가 한 일을 또 ‘해 아래서’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성묘는 그저 선대를 추억할 뿐이다. 크리스천이라고 크게 예외는 아니어서 육친의 묘 앞에서 예배를 올리며 추억할 뿐이다. 따라서 ‘네 아버지는 누구인가’ ‘네 어머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막연하다. 단편적 기억만 머릿속에 맴돌 뿐이다.

사실 우리는 내 아버지의 역사를, 내 어머니의 역사를 모른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자식을 위해 희생했던 어머니의 이미지만 안고 살다가 자기 자식이 성장하면서 그 이미지마저 먼 기억 속으로 떠나보낼 뿐이다. 그러니 내 부모의 신앙을 알 리 없다.

부모님의 신앙 돌아봤으면

이번 한가위를 맞아 배설 후손은 사료를 뒤적이며 선대에 가해진 ‘모욕’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려 할 것이다. 하물며 그러하건대, 요즘 개신교에 가해지는 무수한 모욕에 대해 교계는 왜 손을 놓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욕한 자들과의 ‘영적 싸움’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서로를 탓할 뿐이다. 마치 성묘 자리에서 언성 높이는 형제 꼴이다.

개신교 전래 130년. 믿음의 선대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 교육과 복지 쪽에 혼신의 힘을 쏟아 한국 근·현대사의 주춧돌을 쌓았다. 그들의 회중인 교회는 학교를 세웠고, 고아원을 열었다. 민족교회였다. 6·25 전후세대에겐 성경구락부, 자애원과 같은 이름이 생소하지 않을 것이고 386세대에겐 미션스쿨·사회복지란 말이 보통명사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선대의 위업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폄훼되는가. 바로 국민과 호흡할 통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바울 서신과 같은 기록의 지혜를 갖지 못했다. 목회자는 부흥에만 몰두하여 구제로 시작한 선교의 역사를 등한히 했다. 따라서 한국 근·현대사에 미친 개신교의 영향을 교과서에서조차 제대로 수록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내 부모의 신앙의 역사를 기록하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후대가 그 기록을 보며 추도예배를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역사가 그렇듯 신앙의 역사 또한 그런 조각이 모인 퍼즐이다.

전정희 종교기획부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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