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준동] 부시의 9·11과 박근혜의 4·16 기사의 사진
3000여명이 희생된 9·11테러가 13주년을 맞았다. 매년 사건 발생일 때마다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 바로 9·11진상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유족대표로 증언한 크리스튼 브릿와이저(Kristen Breitweiser)다. 9·11로 남편을 잃은 4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저지 걸스(Jersey Girls)’ 중 한 명인 그는 진상조사위 구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9·11 이후 미국 의회는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는커녕 그 어떤 조사위도 구성하지 않았다.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에 파묻혔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고 조사위가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은 브릿와이저의 편지 하나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테러 이전 부시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9·11테러 피로감’ ‘정치적이고 과격한 좌파’ 등으로 유가족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9·11테러로 남편을 잃은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도 자식이 있다면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겠지요. 우리에게는 포기하고 싶었던 많고 많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너무 지치고 겁도 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우리는 왜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가 죽었는지 아이들에게 말해줘야 하고, 그들이 더 안전한 미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죠.”

이 편지가 공개되면서 여론은 반전됐다. 결국 부시 대통령은 테러가 발생한 지 14개월 뒤인 2002년 11월 27일 ‘위원장은 내가 지명한다’는 조건을 달고 조사위 구성에 동의하게 된다. 위원회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5명씩 추천해 모두 10명의 위원으로 꾸려졌고 위원장은 대통령이, 부위원장은 야당이 임명했다. 수사권은 배제됐지만 강력한 소환권이 주어졌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일일보고(PDB)’까지 위원회에 제출됐고 국가안보 문서 등 관련 자료 250만 페이지가 열람됐다. 2003년 3월부터 2004년 6월까지 총 12차례의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는 부시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 콜린 파월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리처드 클라크 백악관 테러담당 보좌관 등이 줄줄이 증언석에 앉았다. 부시 대통령은 비공개를 조건으로 3시간10분 동안 증언을 하기도 했다. 사실상 성역 없는 조사가 이루어진 셈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 사고라는 점에서 9·11테러와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무수한 경고음이 울렸는데도 사태를 예방할 수 없었다는 점, 지도자들의 무능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는 점 등 서로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 미국 유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진상 규명의 목소리가 5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참사 초기 세월호 슬픔을 함께했던 국민들은 이제 보수와 진보로 갈려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유가족과 야당은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하고, 청와대와 여당은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10여년 전 미국의 상황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1년2개월여 동안 극심한 분열을 거치면서도 9·11진상조사위가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시 대통령의 결단 때문이었다. 부시는 국론 분열을 수습하고자 진상조사위 구성을 받아들였고 직접 증언석에도 섰다.

세월호는 분명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침몰하지는 않았다. 직접적인 책임도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호’의 최고 책임자가 304명의 희생자를 낸 참사 당일 적절한 대처를 지시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관계 당국의 책임도 짚어봐야 한다. 그래야 제2, 제3의 세월호를 미연에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 결단 사항이 아니다”고 대못을 박을 일은 아니다. 삼권분립이 우리보다 더 철저한 미국에서도 대통령이 나서서 꼬일 대로 꼬인 실타래를 풀지 않았나. 부시처럼 우리 대통령에게 고뇌에 찬 결단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희망사항일까.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