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길 다시 가보니-임항] 전나무숲은 태풍을 이겨내고 기사의 사진
임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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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지나고 일주일을 훌쩍 더 넘겨도 백일홍 꽃이 지지 않는다. 시인 안도현은 “배롱나무가 더 이상 꽃을 밀어 올리지 않을 때 가을은 온다”고 했지만, 기후변화 탓에 길어지는 여름을 꽃도, 열매도 서둘러 뿌리칠 수는 없나 보다.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 가도 좋은 곳이 있다. 고창 선운사 주변과 부안 변산반도는 어떤 심리상태에서도 고향처럼 포근하고, 정겨운 풍광과 해안, 다양한 나무, 풀들 덕분에 심심하지 않다. 화사한 봄꽃, 하늘을 가리는 짙푸른 녹음, 단풍 터널, 눈 쌓인 산사와 전나무 숲, 다양한 문화재 등 어느 것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

지난 11, 12일 4년 만에 다시 변산반도를 찾았다. 이곳에서 유명한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은 월정사의 그것에 버금가게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내소사 매표소를 지나면 20∼30m 높이로 쭉쭉 뻗은 전나무 숲이 사천왕문 앞까지 가는 흙길 600여m 양옆에 도열해 있다. 측백나무와 함께 피톤치드향이 가장 많이 나오는 전나무는 원래 높은 산의 춥고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소나무와 달리 햇볕이 적은 곳에서도 잘 자라지만, 공해에는 약한지라 깊은 산에 들어서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사찰들은 속성수로서 목재가치가 높은 전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래서 자생지 풍토와 상관없이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도 전나무 인공림이 눈에 띈다.

이 숲길은 여름철에 햇볕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무성했지만, 지금은 숲 가운데 한 곳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2012년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전나무 30여 그루가 넘어졌고, 10여 그루는 줄기가 꺾여 나갔다. 부러진 전봇대처럼 반 토막만 남은 전나무들은 고사했다. 전나무는 원래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는 데다 곧게 자라는 줄기의 중간 위쪽에서 가지와 잎이 주로 나오는 바람에 무게중심이 높은 곳에 있어서 강풍에 약하다는 것이다. 햇빛을 향해 등을 구부리지 않고,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는 절개가 꼭 대쪽같은 선비를 연상시킨다.

공단이 2007년 조사한 결과 1000그루를 살짝 밑도는 전나무의 가슴 높이 지름은 28∼52㎝, 평균 30㎝ 이상이다. 나도밤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당단풍, 팽나무, 노린재나무 등 아교목과 관목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그러나 내소사 측은 2011년 숲가꾸기 사업을 통해 일부 큰 개체를 제외한 이들 대부분을 제거했다. 1년 후 전나무 태풍피해가 발생했다. 내소사 입구 전나무터널의 여름철 하늘이 뻥 뚫린 것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전나무 숲 가장자리에만 있던 미국자리공 같은 외래종이 빈자리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은 시간이 지나면 외래종은 결국 도태될 것이라고 본다.

숲 속에는 생산자인 식물과 소비자인 동물, 그리고 분해자인 이끼, 조류, 버섯 등 지의류와 선태류, 지렁이와 나무 목질부를 먹는 흰개미 등이 있다. 분해자들은 죽어서 넘어진 전나무를 흙으로 되돌리고, 그 자양분을 바탕으로 새로운 풀과 관목 및 전나무 후계목들이 차례로 자라난다. 150여년 전부터 조성된 내소사의 전나무 숲은 이렇게 대를 이어갈 것이다. 숲을 나오는 길에 붉노랑상사화 한 송이를 발견했다. 잎이 다 사라지고 난 뒤 8월에 피는 꽃은 이미 다 졌어야 하지만, 다행히 지각생 한 송이가 남았다.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변산반도는 바닷가 식물과 산지 식물이 모두 풍부하다는 식물학적 특징을 보인다. 난온대 상록활엽수림과 중부지방의 낙엽활엽수림이 공존한다. 남방계 식물 가운데 이곳까지 올라와 자라고 있는 식물이 많다. 후박나무, 호랑가시나무, 꽝꽝나무 등은 모두 변산반도가 북방한계선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 특산종이자 멸종위기식물인 미선나무는 이곳이 남방한계선에 해당된다. 변산반도 내 이들 4개 나무 군락지는 모두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해안가를 따라가다 모항 근처 도로변에서 호랑가시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122호)를 만났다. 키 2∼3m의 호랑가시나무 700여 그루가 보호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있다. 크리스마스카드에 자주 등장하는 이 상록수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이런 흔치 않은 특성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게다가 잎의 모서리 2∼5군데(각점·角点)가 가시처럼 뾰족해서 까칠하고, 강렬한 느낌을 준다. 가죽처럼 두꺼운 잎의 끝을 손으로 만져보니 진짜 따갑다. 호랑이가 등을 긁는 데 쓸 만하다 해서 호랑가시나무, 그리고 호랑이등긁기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도 안타깝게 사라져 가는 식물들이 있다. 무수한 난과 소사나무, 그리고 바닷가 식물들이다. 소사나무는 분재용으로 선호되는 수종이어서 무분별하게 채취됐다. 난은 하도 캐 가서 마을 주민들은 이제 변산에 ‘똥난’만 남았다고 자조한다. 바닷가 식물 가운데 버릴 것 하나 없는 갯방풍은 뿌리가 중풍을 예방하는 데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개체수가 급감했다. 더부살이식물인 초종용은 많은 모래땅이 매립되면서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다. 그렇더라도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대대손손 이어갈 전나무 숲과 더불어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변산바람꽃, 붉노랑상사화와 상사화, 멸종위기종인 노랑붓꽃과 미선나무 등 희귀식물과 갯까치수염, 갯메꽃, 모래지치 등 바닷가 식물의 보고로 남아 있다.

부안=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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