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경제 살리려는 충정은 이해되나 기사의 사진
얼마 전 인터넷에선 ‘10조5500억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란 글이 떠돌았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를 감정가보다 3배 이상, 경쟁사인 삼성전자보다 훨씬 많은 10조5500억원에 입찰한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이 정도 규모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보유지분액(10조6880억원)에 버금가고 SK하이닉스와 현대증권 등 범현대가의 재결합도 가능하다. 65억원짜리 고가 아파트를 1623가구 살 수 있고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25억7317만732잔 마실 수 있다. 이 돈을 전 국민이 나눠가진다면 각자 21만4000원씩 받을 수 있다. 현대차가 6∼10개의 자동차 조립공장을 세울 수 있고 푸조시트로앵 등 외국 완성차기업을 인수할 수 있는 금액이라는 미국 자동차전문지의 분석도 나왔다.

그런데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말이 더 걸작이다. “100년을 내다보고 결정한 일”이라는 데는 이의를 달 생각이 없다. 울산의 허허벌판 모래사장에 조선소를 짓겠다고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 들고 가 영국 바클레이즈은행의 돈을 얻어낸 게 부친인 정주영 명예회장이니 동물적 사업감각을 물려받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더러 금액이 과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었지만 사기업이나 외국기업이 아니라 정부로부터 사는 것이어서 결정하는 데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는 대목에선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기업들이 아직도 정부에 뭔가를 주고,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최근 비리 기업인에 대한 가석방 얘기가 솔솔 나오는 걸 보면 정 회장의 생각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도 아닌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대기업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중대범죄에 대한 사면권 행사는 더욱 엄격히 제한하겠다”고 약속했고 지금까지 그 원칙을 지켜왔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7월 형기의 80% 이상을 채워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 심사를 통과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가석방을 불허했다. 그러면서 법무부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회지도층과 고위 공직자에 대해 원칙적으로 가석방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기업 총수들이 회삿돈 수천억원을 횡령하거나 탈세하는 중대 범죄를 저지르고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정찰제 판결로 풀려나거나 ‘휠체어’를 타고 가석방되던 것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랬던 정부가 경제 살리기를 이유로 원칙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황 장관이 “기업인이라고 가석방 대상에서 배제하는 불이익을 줘선 안 된다”고 군불을 때자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기업인이라고 지나치게 엄하게 법집행을 하는 것은 경제 살리기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며 거들었다. 엊그제는 “기업인 가석방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이 많다”고 한술 더 떴다.

지난 8월 설비투자는 10.6% 줄면서 11년7개월 만의 최대 감소폭을 보였다.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금리를 내렸는데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고 있으니 경제수장으로서 기업투자에 목매는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수감 중인 대기업 회장 한두 명을 풀어준다고 기업투자가 살아날까. 이명박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고환율 정책과 법인세 감면을 해주며 투자를 독려했지만 기업들은 투자를 늘리기는커녕 사내유보금만 쌓았다.

진작 대기업 총수들의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벌했다면 어땠을까. 학습효과로 지금 감옥에 가 있는 총수들은 없었을 것이다. 기업들 팔목을 비틀거나 ‘떡’ 하나 준다는 식으로 흥정하면서 투자를 이끌어내던 시대는 지났다. 기업은 돈벌이가 된다 싶으면 정부가 하지 말래도 달려든다. 정부가 정말로 경제를 살리고 싶다면 자꾸만 해외로 나가서 공장 짓겠다는 기업들이 국내로 돌아올 수 있도록 불합리한 제도를 뜯어고치고 멍석을 깔아주면 될 일이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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