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속의 샘] 부끄러움, 우리의 근원을 향한 그리움 기사의 사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윤동주 ‘서시’ 1연)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외워보았던 작품이다. 소녀보다 여린 감수성과 종교인의 숭엄함이 묘하게 공존한다. 그런데 이 시의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때렸기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가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부끄러움이라는 말이 아닐까.

‘날마다 세 번 반성하노라’는 옛 현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기 직전 이불 속에서 눈을 감고 하루를 돌아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오늘을 돌아보다가, 혹은 불현듯 오랜 예전 자신이 행한 어떤 일이 생각나 캄캄한 밤 뒤집어 쓴 이불 속에서 혼자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옛 글을 처음 배우던 때 은사 여산(與山) 선생님으로부터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의 차이에 대한 인상비평적인 말씀을 들었었다. “동양적 사유의 바탕에는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에 비해 ‘인간은 신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서양적 사유이다.” 아마도 두 사유의 차이를 명징하게 드러내려고 던지신 말씀 같은데, 미련퉁이 제자였던 나는 그 순간 두 사유의 공통분모에 더 관심이 갔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로 나는 부끄러움을 상정한다. 짐승은 부끄러움이 없다. 그런데 부끄러움이 없기로는 신도 마찬가지이다. 부끄러움이 있기에 인간은 짐승이 아니고, 신 앞에 결점투성이인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에 인간이다. 신독(愼獨)과 대월상제(對越上帝)는 이 지점에서 교집합을 이룬다. 내가 부끄러움을 가장 인간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요즈음 TV를 켜거나 신문을 펼치기 민망하고 두려울 때가 적지 않다. 예전 같으면 성인 통속 잡지의 한 구석에 숨겨져 있을 법한 사건이 지상파 방송에서 요란하게 다루어지거나 신문 사회면의 중심을 장식할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제주지검장과 경찰의 공연음란행위, 전 국회의장의 성추행, 유명 탤런트의 추문이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아직도 곧이 믿어지지가 않는데, 관련 인물이 고위 공직자요 우리 정치와 문화에 적잖이 권력을 행사하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어서 더더욱 그렇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기 마련인가. 성폭행이나 성추행 관련 기사는 이제 하루를 멀다하고 사회면에 등장한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현상이 특정 부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치인 자녀의 부정 임용, 박물관장의 도굴 문화재 은닉, 일상화된 음주운전을 비롯해 국정 비판을 가장해 대통령에게 원색적인 야유와 욕설을 날리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는가 하면, 나라 사랑을 앞세운 백색 테러까지 등장했다. 그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부끄러움은 사라진 말이 되었다.

왜곡된 법치주의도 부끄러움을 없애는데 한몫하였다. 교묘한 논리로 법의 그물을 피해갈 수만 있다면 양심과 윤리 따윈 아무 문제없다는 인식이다. 형정(刑政) 정치만을 강조하면 백성들이 법적 책임을 면하려고만 할 뿐 부끄러움이 없어진다는 공자의 말은 마치 오늘을 위해 준비해둔 명언인 듯하다. 정치 개입은 했지만 대선 개입은 아니라는 최근의 판결은 부끄러움이 증발한 왜곡된 법치주의의 극단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선인들은 전통적으로 부끄러움에 대처하는 자세를 가지고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아왔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반성하여 진정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군자라 한다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남에게 들킬까 부끄러워하여 그것을 가리기에 급급한 사람을 소인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기에 급급한 사람은 작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더 큰 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게 마련이다. 소인이 악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동양에서 으레 사용되어온 활쏘기에 비유해보자. 화살이 정곡을 맞히지 못하면 군자는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활쏘기 자세를 부끄러워한다. 그를 통해 자신을 바로잡는다. 그에 비해 소인은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이 밖에 알려질까 부끄러워한다. 때문에 기상천외한 궤변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간사한 계교로 도리어 상대방을 부정한 반칙자로 몰아간다. 그런 점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참으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다”고 한 맹자의 말은 부끄러움 없는 소인을 위한 일침이라 하겠다.

뻔뻔함을 당당함이라고 호도하는 세상,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며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다짐한 시인의 순수함을 바라기에는 시대가 너무 탁해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부끄러움이란 우리의 근원을 향한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이라고 한 본회퍼(1906∼45)의 말의 의미가 더더욱 간절해진다.

이규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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