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남성현] 비숍 여사와 토마 피케티 기사의 사진
19세기 말 우리나라 모습을 알고 싶다면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들추어 보아야 한다. 비숍 여사는 1894∼1897년 사이 4번에 걸쳐 도합 11개월 동안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여행한 후 1898년 런던에서 이 책을 펴냈다.

비숍 여사의 생생하고 흥미로운 묘사 중 조선 농민에 대한 내용이 특별히 눈에 들어온다. 농민들은 굶주리지는 않지만 돈이나 재산이 없다. 땅이 비옥하지만 겨우 “하루 세끼를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만 경작”하기에 가난하다. 왜 그럴까? 농민들이 가난한 건 부패한 정치 때문이다.

비숍 여사는 지배계층에 대해 매서운 독설을 내뿜는다. “한국은 단 두 계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 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 계급, 그리고 인구의 나머지 5분의 4인 하층 평민 계급이 그것이다.

평민 계급은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관리들은 나라의 월급을 축내고 수뢰를 받는 일 외에는 할 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관리들은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가보다 어떻게 갈취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굶주리지는 않지만 가난한 조선 농민들

비숍 여사는 권력이 수탈의 도구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전봇대가 필요해서 관찰사가 각 호마다 100푼을 징발하면 수령이 200푼으로 울리고 고을아전이 250푼으로 더 올린다. 또 누가 얼마간의 돈을 모으면 관리는 그걸 빌려 달라고 한다. 만일 상환을 요구하면 체포되어 조작된 죄목으로 벌금이 부과되고 투옥된다. 그래서 얼마간 현금을 갖게 되면 관리들로부터 안전하게 보관하려고 돈을 땅에 묻어 두기도 한다.

비숍 여사의 눈에 비친 “한국 관리들은 살아 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동시대 전 세계의 여인 중 아마도 세계를 가장 많이 누볐을 성 싶은 비숍 여사는 조선에 보내진 ‘19세기 영국인 예레미야’가 아니었을까 싶다(참조 렘 5:26∼29).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의 예레미야’라고 불러주고 싶다. 피케티의 저서는 자본의 수익률이 노동과 생산의 수익률보다 높다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딜레마에 천착한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과 생산을 통한 수익보다 빠르다면 어떻게 될까? 피케티는 이런 구조가 심화되면 소득 양극화가 첨예화되어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에 대해 ‘누진적인 자본세’ 부과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즉 부유한 자들에게 소득세를 넘어 보유한 자본 전체에 대해 누진세를 부과함으로써 장차 위기에 처하게 될 민주주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불평등은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

우리나라의 재계는 피케티의 이론을 공격한다. 우리나라 경제에 필요한 것은 여전히 성장이지 분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높아야 소득도 향상된다는 성장우선주의는 재계가 늘 반복하는 상투적인 후렴구다. 그런데 지난 10월 2일에 발표된 한국은행의 보고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소득불평등 심화 배경과 대응과제’의 요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20년간 경제성장률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OECD 회원국의 소득불평등이 악화되었다. 소득불평등은 구조적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지 경제성장률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누진세와 정부의 소득재분배 강화, 양질의 일자리 창출, 노동시장의 안정성 향상 등 구조개선을 강조했다.

100년 전 비숍 여사가 제시한 한국의 쇄신 방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은∼ 교육으로써, 생산계급들을 보호함으로써, 부정직한 관리들을 처벌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관직에 대해 실제로 일한 만큼만 지불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만 한다.”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정치와 이런 정치에 바탕을 둔 경제라야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들의 잇속만 채우는’(렘 5:28) 눈속임에 불과하다.

남성현 한영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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